쇠뿔 위에 피어나는 곱고 천진스러운 색채의 미학
문헌상 우리나라에서 화각공예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시대에 발달했던 대모(거북의 등과 배를 싸고 있는 껍데기) 공예에서 그 관련성을 찾는 시각이 있다. 대모 공예란 대모를 얇게 갈아서 그 뒷면에 그림을 그려 목공예품의 표면에 장식하는 기술이다. 고려 중기 이후 수입품인 대모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모 공예는 점차 쇠퇴하였고, 그 후 대모가 투명도가 더 높은 쇠뿔(우각)로 대체되면서 조선 중기부터 화각 공예가 성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에 ‘전주 화각기’를 남겼는데, 이 글이 화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각공예는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워 주로 양반 귀족층의 기호품이나 애장품, 특히 부인과 어린아이의 공간인 내실의 각종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현재 전해지는 화각공예품으로는 장·농·사방탁자·문갑과 같은 가구류와 작은 예물함, 경대, 필통, 바느질자, 경상(경을 올려놓는 책상), 연상(벼루 먹 붓 연적 따위를 담아 두는 작은 책상), 반짇고리, 부채, 붓대 등이 있다.
화각공예는 크게 ‘골각 작업’과 ‘채화 및 옻칠 작업’, 두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골각 작업은 3~4년생 젊은 황소의 뿔을 잘라 쇠뿔의 각질 부분을 펴서 평평한 뿔판(각판)으로 만들고, 이 판을 다시 깎고 갈아서 종잇장처럼 얇고 투명한 ‘각지’(화각지)로 가공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박타기’(한쪽 면을 톱질하여 펼칠 수 있도록 가르는 작업)한 쇠뿔들을 부대에 담아 2년 정도 보관해 두었다가 가공해 각지로 만든다. 2년 정도 묵히지 않은 것은 뿔의 원상태로 말리어 오르는 성질이 강해 쓰기에 좋지 않고, 2년 넘게 경과한 것은 거스러미가 일어나 각지의 품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골각 작업과 함께 ‘우골 계선’을 제작하는 작업도 병행된다. 쇠뿔로 만든 각지는 크기가 작아 화각공예 때 몇 개의 각지를 목재 기물 표면에 연속해 붙여 사용한다. 이때 각 각지의 경계에 쇠뼈를 가공해 만든 상아색의 오리(가늘고 긴 조각)를 박아 넣는데 이것이 바로 우골 계선이다.
다음으로 채화 작업이 진행된다. 화각의 무늬 그림은 투명한 각지의 뒷면에서 비쳐 보이도록 하는 복채화 기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보통 그림을 그리는 순서와 반대 순서로 그려 나가게 된다. 반투명지에 연필이나 세필로 그려놓은 무늬 그림에 먹선을 넣은 후 이 먹선화(밑그림)를 뒤집어 놓은 상태에서 그 위에 각지를 맞추어 덮고 밑그림의 무늬나 문양 등 그림을 전사하여 채색하는 방식이다.
채화 작업을 마치고 각지를 부레풀로 목재 기물에 붙인 뒤 각지 이외의 부분에 옻칠을 하고 기물의 표면에 윤을 내면 하나의 화각공예품이 마침내 완성된다. 기물의 종류에 따라선 여기에 경첩, 들쇠 등 장석을 부착하는 별도의 공정을 거치기도 한다. 쇠뿔로 각지를 만들기까지 2년의 기다림이 필요하고, 작은 예물함 한 개를 만드는 데 적어도 한 달 이상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하니 화각이 얼마나 어려운 인고의 공예인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화각공예는 색채 및 문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실용공예로서 우리나라의 전통공예, 특히 목공예 가운데에서도 매우 특색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 화각공예품에 묘사된 무늬나 그림은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십장생과 운룡·운봉 무늬, 길상 문자 무늬를 비롯해 모란 천도 석류 국화, 나비 잠자리 벌 등 민화에 등장하는 각종 동식물 등 다양하다. 또한 적·청·황·백·흑의 오방색을 기본으로 한 여러 가지 간색이 다채롭게 사용되었다.
미술평론가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 최순우 선생은 언론에 쓴 칼럼에서 “노랑 연두색 빨강 등으로 그려진 화각장의 무늬에는 순정과 동심의 천진스러운 아름다움이 깃들어 비할 데 없는 치기미(稚氣美)를 발산해준다”고 평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0년 2월 5일자 참고).
조선후기를 풍미했던 화각공예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화각공예품에 매료된 몇몇 일본인 사업가들이 국내 화각 공방에 셀룰로이드 판을 공급해, 쇠뿔로 만드는 각지를 대용하게 하면서 화각 모방품을 양산시켰기 때문이다. 값싼 모방품이 전국 시장에 대량 유통되면서 화각공예품의 희소가치와 품위가 떨어져 결과적으로 상당수 화각 공방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맥이 끊겨가던 화각공예 기술은 한말부터 3대째 각질장으로서 가업을 이어온 고 음일천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이재만 선생이 1996년 화각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됨으로써 지금까지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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