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의거 속 ‘인간적 고뇌’ 담은 작품…“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까레아 우라’ 전달되길 바라”
“우민호 감독님이 처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거사’(하얼빈 의거)와 그 이후의 상황보다 거사를 치르는 과정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 하셨어요. 독립투사로서 안중근 의사도 있지만 그 이면의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된 작품이었던 거죠. 저 역시도 흥미로웠어요.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시원한 결말이나 ‘빵’ 터지는 그런 것들은 아니에요.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계속해서 이뤄내고자 나아가야 하는 밑거름, 독립군들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죠. 그런 면에서 기존에 나왔던 것들과는 목적도, 방향성도 완전히 달랐던 작품이었어요.”
영화 ‘하얼빈’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령 만주 하얼빈에서 이뤄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중심으로 독립군들이 가진 저마다의 고뇌를 그려낸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 분)이 이끄는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지만 안중근이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의 일본인들을 풀어주면서 독립군 사이에서 그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밀정이 숨어들었을지 몰라 수년을 알고 지낸 동지여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 안중근은 동지들과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대의를 이루는 데 뜻을 모은다.
“이창섭 동지(이동욱 분)와 충돌이 생긴 뒤 둘만 있는 공간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신이 있어요. 그 이후 ‘거사’를 치르러 가는 과정 중에 이 동지가 ‘네가 시작한 일이니 네가 해야지’라는 대사를 하죠. 서로 방식은 달랐어도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촬영했어요. 안중근 장군은 군인으로서 원리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과 의지대로 판단하지만 이 때문에 이 동지와 충돌하게 되죠. 이로 인한 결과를 두고 동지들의 희생에 미안함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어요. 이동욱 배우와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촬영했던 기억이 나요.”
‘하얼빈’에서 현빈이 연기한 안중근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보다 거대한 역사 앞에 놓인 한낱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내적 갈등이 좀 더 부각되는 인물이다. 동지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거사의 자리에 섰던 그가 종국엔 자신 역시 남은 독립군들의 발걸음을 지탱해주는 새로운 발판이 돼야 했다. 안중근이란 인물이 당시에 느껴야 했던 압박감과 책임감, 그리고 부담감은 그를 연기한 현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했다.
“사실 지금도 그 압박감은 극복하지 못했어요(웃음). 이제 다시 ‘하얼빈’을 이야기할 때가 오니까 스스로에게도 계속 질문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안중근이란 인물의 상징성과 무게감이 크다 보니 제가 말 한마디를 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죄송스러워요. 지금도 압박감이 있지만 촬영할 땐 이 이상이었는데요, 끝나고 나서야 확 내려놓았던 것 같아요. 없어진 건 아니지만 짓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났다는 기분이죠. 그래도 버티면서 할 수 있었던 건 함께 해준 배우들의 힘 덕분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현장에서 고민하고 고뇌하고 있었고, 모두에게 또 의미 있는 작품이었으니까요. 제 ‘동지’들이 많은 힘이 됐죠(웃음).”
‘하얼빈’은 흔히 ‘애국 영화’로 분류되는 장르의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 사이다처럼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뚜렷한 카타르시스가 있지는 않다. 물기가 덜한 붓으로 수묵화를 그려나가듯 담담한 색채를 유지하는 이 작품 속, 그중에도 가라앉아 있던 관객들의 마음이 세차게 떠오르는 신을 꼽자면 역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마지막 신일 터다. “까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안중근의 처절한 목소리로 스크린을 울리는 데서 청각을, 눈빛 속에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 담아낸 교수대 신에서 시각을 사로잡은 두 신은 현빈에게 있어서도 가장 어려운 신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슴에 사무친 신이라고 했다.
“‘까레아 우라’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랐어요. 그래서 (거사 후) 잡히고 나서도 목이 갈라질 때까지 외치고 있어요. 스크린이 암전된 후에도 계속 울려 퍼지죠. 잡혀 있는 안중근의 얼굴보다 그 소리가 귀에 박히길,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까요. 교수형을 앞두고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쓸 때도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두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 고난과 역경이 끝나지 않았는데, 나 아닌 누군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나만 여기서 쏙 빠진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컸죠.”
누군가는 그에게 작품 속 안중근을 연기한, 작품 밖 현빈에 대한 ‘우려’는 없었느냐고 묻는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유독 일본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많다 보니 출연을 결정하기에 앞서 역시 현빈의 ‘인간적인 고뇌’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심 아닌 의심이다. 앞서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으로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은 그가 왜 굳이 모험을 시도했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현빈은 덜지도, 더하지도 않고 그저 ‘해야 했던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왜 출연을 결정했는지를 제 주변에서 많이들 궁금해 하시더라고요(웃음). ‘그게 맞는 선택이냐’ 라면서요. 그런데 저는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얼빈’뿐 아니라 이런 역사적인 일이나 가슴 아픈 기억에 대한 이야기들이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또 대중들에게 보이면, 그로 인해서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살았던 감사한 마음도 다시 생각하게 될 거라고요. 이렇게 영화나 드라마라는 영상을 통해 접하는 건 접근성도 참 쉽잖아요. 아마 이런 역사를 모르는 이들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겠죠.”
2022년 11월부터 ‘하얼빈’을 찍는 동안 현빈의 삶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생겼다. 아내이자 배우 손예진과의 사이에서 ‘인생의 0순위’인 아들이 태어난 것. 이제까지 자신이 중심이었던 삶에서 더욱 우선해야 할 존재들이 생기고 나니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하는 ‘즐거운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아빠로서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열게 된 현빈은 이번 ‘하얼빈’을 통해 그의 아들을 포함한 새로운 세대들이 걸어갈 미래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크랭크인 전에 고사를 지냈는데 다음 날에 아이가 태어났어요(웃음). 정말 많은 게 달라지더라고요. 제 생각부터 역할까지도요. 이제 제가 아닌 다른 존재를 중심으로 삶을 살게 되니까 가장 우선순위부터 바뀌었어요. 제 분신과 아내, 이렇게 두 분이 공동으로 제 인생에서 첫 번째고요, 저는 두 번쨉니다(웃음).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저희 영화를 통해 어떤 것이 닥치더라도 한 발 한 발 걸어나가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면 좋겠어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듯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분명 또 다른 어려움을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미 그런 것들을 다 이겨내 왔다는 걸 기억하면 좋을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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