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토론은 후보자가 직접 본인의 공약을 설명하고 상대 후보자에게서 나타나는 정책 문제점을 나열하는 등 실시간으로 상호 경쟁하는 모습을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일요신문 취재 결과, 윤 캠프 측은 구체적인 대선 공약이나 청사진을 제시하기보다 상대 후보 네거티브에 더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선후보의 TV토론 전략을 세운 팀이 근무한 곳은 윤석열 당시 후보의 비밀캠프 의혹을 받는 갤러리 '예화랑'이었다.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은 남매인 김방은 대표와 김용식 감사 등이 소유한 갤러리였다. 당시 캠프에 있던 인사들에 따르면 캠프 내 고용·교육·경제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문서를 작성해 넘기면 TV토론팀이 이를 토대로 토론을 준비했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대선 당시 윤 캠프에서 만든 TV토론 문건 일부를 입수했다. 이 가운데 ‘예상 질의 응답(전반적인 사항)’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앞으로 수차례에 걸쳐 열릴 TV토론의 전반적인 방향성이 제시됐다.
구체적으로 대선 후보자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축할지 적혀 있는데, 윤 후보 측은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를 ‘말이 길고 욕심 많은 찌질이’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윤 후보 자신은 ‘꾹 참는 형님’ 이미지로 상반 구도를 만들자고 했다. 문건에 적힌 원문은 다음과 같다.
<안철수>
Q. (단일화) “정권교체 찬성하나, 반대하나? 예/아니오로 대답해달라.”
―안철수가 길게 대답하려 하면 “예, 아니오만 대답해주십시오”하고 자르고, 바로 다음 질문 던질 것
Q. (단일화) “이재명 당선 정권교체냐, 아니냐. 예/아니오로 답하라.”
―“아니요” ⟶ “아 네~” 라고 끊고 다른 질문으로 점프
―“예” ⟶ “아 네~ 그러셨군요” 라고 끊고 다른 질문으로 점프
―“예/아니오”로 대답 못하고 길게 답하면 ⟶ “간단한 질문인데 예/아니오로 대답 못하시네요” 바로 끊고 다른 질문으로 점프
※안철수와 말싸움 끌려들어가면 우리가 이겨도 손해, 져도 손해. 말보다 태도로. ‘안철수=말이 길고 욕심 많은 찌질이’ ‘윤석열=꾹 참는 형님’ 구도를 보여주는 데 주력해야취재결과 이 문건은 2021년 12월 15일 수요일 오후에 최초 작성돼 2022년 2월 28일 월요일 오후 6시에 최종 완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2월 28일은 안 후보가 대선 완주 의사를 밝힌 지 8일 지난 시점으로, 윤 후보 측이 단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물밑 회동을 추진하던 시기다.
#대장동만 다룬 29쪽 분량 문건도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해서는 ‘피의자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라’는 공격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동과 관련해 ‘이재명이 어려운 말을 하면 무조건 대장동 배수구만 강조할 것’ 을 주문했다. 또 이 후보의 아내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질문을 하는 척하면서 비꼬는 식의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장동>
Q. 왜 이런 파일이 분당 고속도로 배수구에서 나오나. 대장동 배수구 파일과 관련해 민주당이 “다 나온 얘기”라고 폄하하는데, 사안의 핵심은 왜 이런 파일이 분당 고속도로 배수구에서 나오느냐다.
※ 이재명이 뭐라고 답하건 길게 듣지 말고 끊고, 배수구, 배수구, 배수구 강조
<옆집 게이트(김혜경)>아예 대장동만을 다룬 문건도 확인됐다. ‘TV-토론 대장동게이트 등 질문 아이템 및 포인트’라는 29쪽 분량의 문건은 이 대표 측근의 사망 의혹과 친형 논란 등 이 후보를 겨냥한 네거티브 질문들로만 채워졌다. 질문 목표는 △가짜 유능(=부패에 유능) △부패 or 무능 프레임 △거짓말 △폭력성이었다.
Q. 법카 소고기 10인분. 가족들이 드신 것이냐.
※ 도덕 논쟁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아주 진지하게 여쭤본다는 태도가 중요. 뭐라고 답하건 기다리지 말고 다른 질문으로 점프
‘질문 아이템 및 포인트’ 항목에선 총 9개의 기본원칙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트라우마 자극’이었다. 윤 캠프 측은 “허위사실공표죄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질문 내용과 방식을 취해야 한다”며 “(이 대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기억이 없다는 것 자체도 ‘허위사실공표’라고 공격하라”고 했다. 특히 붉은색 굵은글씨로 강조된 부분에는 중요 표시와 함께 ‘끊임 없이 허위사실공표 트라우마 자극’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밖에도 ‘검사 대 피의자 이미지로 몰고 간다’ ‘시청자로 하여금 머릿속에 프레임이 그려지게 규정을 짓고 질문을 한다’, ‘모르는 일이라고 했을 땐 무능 프레임으로 몰아친다’ ‘거짓말 프레임으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음’ 등을 질문 기본 원칙으로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윤 후보는 2022년 2~3월에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TV토론에서 대장동 관련 질문을 집중적으로 했다.
#'성범죄 비서관 면직 처리' 거짓말 하라
TV토론 자료의 상당수가 상대 후보 네거티브로 채워진 만큼 윤 후보 자신에게 가해질 공격의 방어 논리를 세우기도 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예상 질의 응답(전반적인 사항)’ 문건 중 ‘우리측 수비 포인트’라는 항목에는 윤 후보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각종 논란, 젠더 감수성 논란, 민주당의 검찰공화국 공격을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었다. 특히 도이치모터스와 코바나콘텐츠 논란에 대해서는 "모두 투명하게 공개했다"거나 "검찰이 오랫동안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를 반복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나 방어 전략은 없었다.
<후보 개인>젠더 이슈엔 말려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문건에는 “심상정 후보가 ‘현실에선 여성 불평등이 엄존한다’는 식의 공격을 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은 3가지 전략으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내용이 적혔다. 제시된 3단 전략은 △통계 싸움에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할 것 △현행 여가부(여성가족부)는 국민 불만이 많다는 원론적인 대답을 할 것 △윤미향과 박원순, 오거돈 등을 거론하며 역공할 것 등이었다.
Q. (부인) 도이치모터스, 코바나콘텐츠 등
― 어떤 질문이 나오건 “모든 자료 투명하게 공개했다. 검찰이 오랫동안 털었다. 문제 있었으면 이미 제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는 답변 반복
― 뭐라고 대답해도 비틀어서 받을 테니, 새로운 땔감 전혀 안 주는 것이 최선
뿐만 아니다. 성범죄 혐의로 물의를 일으킨 비서관이 실제 면직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관련 질문이 나오면 “바로 면직 처리했다”고 거짓 답변을 하라고 했다. 앞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메시지 업무를 담당한 비서관 A 씨는 여성 신체를 불법 촬영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았다. 당시 민주당은 “A 씨가 윤 후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에 관여했다”며 “불법촬영하려고 여가부 폐지 공약을 내세웠느냐”고 공격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윤 후보의 방어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작성자, 촬영이 밖에 또 다른 ‘토론방어용 준비양식’ 문건엔 그 무렵 논란이 된 윤 후보의 주 120시간 근로시간 발언에 대한 방어 논리 등도 기재돼 있다.
― “송구하다. 바로 면직(조사로 인해 실제 면직처리는 안되었다고 함). 경찰 조사 성실히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이러려고 여가부 폐지 공약 낸 거 아니냐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면 “여성가족부 폐지 국민 과반(51.9%)이 찬성. 지금 형태로는 우리 사회 젠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국민적 공감대. 이 문제를 여가부 폐지 공약과 연결하는 것은 악의적” (YTN 의뢰 리얼미터 조사 : 여가부 폐지 찬성 52%, 반대 39%)
#이재명 도발에 전략대로 못 하고 ‘욱’하기도
다양한 토론 전략을 세웠음에도 정작 토론에선 격앙된 감정에 못 이긴 윤 후보가 전략과는 정반대 행동을 한 점도 눈길을 끈다. 문건에 따르면 당초 윤 후보는 이재명 후보가 ‘부산은행 대출 의혹’이나 ‘국민의힘 게이트’ 등으로 역공을 해올 경우 “이 자리에서 특검 합의하자”로 맞받아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 토론에서 특검을 먼저 제안한 건 이 후보였다. 이 후보는 2022년 3월 2일 열린 3차 사회분야 토론에서 대장동 의혹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윤 후보에게 “대통령 선거가 끝나도 특검 하는 걸 동의해주시라. 거기서 문제가 드러나면 대통령에 당선돼도 책임지자는 데 동의하시나”고 수차례 되물었다.
이에 윤 후보는 “이것 보세요”라고 언성을 높이며 “대통령 선거가 국민학교 반장 선거냐”고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토론이 끝난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도 “아까 이 후보가 특검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어이가 없다”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윤 후보가 평정심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제20대 대선 TV토론은 ‘기승전 대장동’이었다. 대선 공약이나 국민을 위한 정책 토론은 거의 없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한 1, 2차 TV 토론에선 대장동과 주가조작 의혹으로 윤 후보와 이 후보의 설전이 이어졌다. 마지막 토론에서조차 페미니즘과 대장동 이슈가 토론 시간 대다수를 차지했다. 2022년 3월 10일 한국갤럽이 대선에서 투표한 유권자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발표한 ‘제20대 대통령 선거 사후 조사’ 결과, 투표 결정 시 참고한 정보원 1위는 ‘TV토론(46%)’이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