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불안, 원·달러 환율 금융위기 이후 최고…구조 개혁 장기전, ‘밸류 업’ 시급 목소리 커져
환율은 국가 경제의 대외경쟁력을 반영한다. 원화 가치 급락은 달러 수요 급증의 결과지만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7년 외환위기도 달러 부족으로 발생했지만 근본 원인은 우리 경제의 대외경쟁력 붕괴에 기인했었다. 최근 우리나라 간판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크게 약화됐다. 다만 구조적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당장 증시 등 금융시장에서라도 해외로 이탈하는 달러를 막기 위해 상법 개정 등을 통한 증시 ‘밸류 업’(Value Up)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2월 들어 1400원을 넘어섰고 12·3 비상계엄 이후 상승폭을 키우며 지난 12월 26일에는 장중 1465원을 넘어섰다. 2024년 원화 가치 하락폭은 브라질(헤알), 아르헨티나(페소), 터키(리라), 멕시코(뉴페소)에 이어 주요국 5위 수준이다. 특히 12월 낙폭은 4.82%로 사실상 외환위기 상황인 브라질(6.76%)에 이어 2위다. 선진국 위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통화가치만 하락한 것이 아니다. 증시 추락 추세도 심각하다. 코스피는 지난 7월부터 6개월 연속 월간 기준 하락세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6월~11월 이후 최장이다. 한 달만 더 하락하면 외환위기 때인 1997년 6월~12월 세웠던 7개월 연속 하락 기록과 같게 된다. 프랑스와 브라질 정도를 제외하면 2024년 주요국 증시 대부분이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글로벌 시장 탓을 하기 어렵다. 우리 내부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 된다.
우리 경제가 2% 미만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1956년(0.7%), 1980년(-1.5%), 1998년(-4.9%), 2009년(0.8%), 2020년(-0.7%), 2023년(1.4%) 등 총 6차례다. 1956년을 제외하면 석유파동,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글로벌 긴축 등 ‘위기’ 때였다. 성장률이 2년 연속 2% 미만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한국은행은 최근 2025년과 2026년 경제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기저 효과를 감안한다면 2년 연속 저성장은 심각한 경기 침체다. 증시 역시 마찬가지다.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외환위기 직전(1995~1997년)을 제외하면 2년 이상 연속 하락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025년에도 증시가 오르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증시 상승의 원동력은 기업 이익이고 우리나라의 경우 이는 주로 수출에서 만들어진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최근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1000대 기업 중 12대 수출 주력 업종을 대상으로 '2025년 수출 전망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 기업들은 2025년 수출 증가율이 2024년 대비 1.4%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주요 원인으로는 '주요 수출대상국 경기 부진'(39.7%), '관세 부담 등 보호무역주의 강화'(30.2%)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한경협이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종합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2025년 1월 전망치가 84.6다. 34개월째 내리막인 데다 펜대믹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경영 환경이 암울하다는 뜻이다.
달러 강세 환경도 좀처럼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미국 경제는 2025년에도 2% 이상 성장이 예상된다.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을 할 것이란 관측이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새해 미국 증시가 2024년(23%)만은 못해도 10% 이상은 상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주요국 전망치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높은 관세로 무역적자는 줄이면서 감세와 재정지출로 국내 경기는 부양하려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이 펼쳐지면 글로벌 시장에 공급되는 달러는 줄고 미국 국내에 머무는 달러는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 자산가격만 오르게 돼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내리기 어려워진다. 달러 강세의 지속이다.
인공지능(AI)에 이어 양자컴퓨팅에서도 미국 기업들이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현재 미국 증시의 밸류에이션은 이익전망치로 기업가치를 측정한 1988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주가수익비율(PER)이 22.5배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의 평균이 14배로 격차가 역대 최대다. 반면 거품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다. 2000년 IT 버블 때 인터넷 기업은 상당수가 이익 기반이 취약했지만 최근 미국의 혁신기업들은 대부분 이익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금이 미국 금융시장으로 향할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흘러나가는 투자금의 규모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해외투자는 곧 달러 환전 수요다. 환율 상승 요인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 8월부터 국내 주식을 순매도하기 시작했다. 12월에도 2조 원 이상 순매도가 진행돼 2024년 연간 기준 순매도 전환이 이뤄졌다. 국채 선물 시장에서도 최근 매도세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시장 이탈이다. 한국예탁결제원 집계를 보면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 보유액은 12월 19일 기준 1112억 6000만 달러(161조 2500억 원)으로 2023년 말 대비 63% 급증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기금의 ‘해외행’도 계속되고 있다. 기대수익률이 더 높은 이유도 있지만 곧 닥칠 보험료 수지 적자를 대비하는 목적도 있다. 국내 자산보다 해외 자산을 보유해야 현금화 때 국내 시장 충격을 줄일 수 있다.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투자는 399조 680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24.5% 증가했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투자 규모는 148조 원에서 145조 800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오죽하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확대를 원화 약세 주원인 중 하나로 꼽을 정도다.
국내 증권사들의 2025년 코스피 전망은 ‘상저하고’로 최저 2300, 최고 3000선이다. 어려운 상황 속 직면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반등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당장 환율 상승세를 막지 못하면 반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가치가 추락하는 자산에 머무를 투자자는 많지 않다.
문제는 고환율을 단기간에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글로벌 경기 둔화로 수출 부진은 꽤 오래 지속될 전망이다. 국내 간판 수출기업들의 저하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 출범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고위급 통상 협상 채널을 서둘러 열어야 하지만 12·3 비상계엄 사태로 불가능해졌다.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절하는 방법은 응급 처방일 뿐이고 부작용도 크다. 한은이 금리를 높이면 환율을 낮출 수 있지만 경기에 치명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보면 2023년 말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가계+기업) 부채비율은 207.4%로 이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101개 국가 중 2위, 선진국 중 1위다. 기업실적은 부진한데 금리까지 높으면 빚 부담으로 내수가 위축되고 대출 부실은 커진다. 고환율 상황에서 경기 살리자고 금리를 내리면 인플레이션 재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펀더멘털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급 개선이 효과 빠른 대책일 수 있다. 증시 등 국내 금융시스템에서 해외로의 자금 이탈을 최소화하는 것이 짧은 시간 안에 환율을 안정시킬 유일한 방법이란 지적이 나온다. 우리 증시의 ‘밸류 업’ 작업이다. 이 때문인지 내란 논란과 탄핵 정국이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2월 19일 상법 개정안 토론회를 직접 주재했다. 사실상 대주주가 경영권을 독점하는 회사가 아니라 주주 전체에 충실하도록 이사의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민주당 상법 개정안의 핵심이다. 이사회가 대주주만이 아닌 주주 전체의 이익에 충실해지면 주주 환원이 늘어나 국내 증시로의 자금 유입이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 투자자 단체의 입장이다.
반면 재계는 주주와 이사 간 소송 남발로 경영 안정이 흔들리면 기업가치에 부정적이라며 반대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이 재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당 단독으로라도 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강행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최열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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