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드왕 차지했던 2008시즌 가장 잊지 못해…나에게 혹사는 아픔 아닌 아름다운 추억”
21년간의 프로 생활 중 1004경기는 구원 투수로, 1005번째 경기를 선발 투수로 공을 던진 정우람은 KBO리그 투수 최다이자 단일리그 기준 아시아 투수 최다 출전 기록을 세우고 프로 생활을 마무리했다. KBO리그 통산 1005경기 977⅓이닝 64승47패, 197세이브, 145홀드, 평균자책점 3.18이 정우람의 통산 성적이다.
12월 중순 경기도 시흥시 배곧신도시에서 정우람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2004년 2차 2라운드 전체 11순위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에 지명된 정우람은 2016시즌을 앞두고 한화와 4년 총액 84억 원의 FA 계약을 맺으며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2019시즌 마치고 한화와 4년 39억 원에 두 번째 FA 계약을 이어갔고, 2024년에는 플레잉 코치로 2군에 머물렀던 그는 2025년부터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정우람은 은퇴식 전후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방송 해설위원을 제안받기도 했고, 코치 연수를 통해 야구 공부를 더 할 계획도 있었지만 ‘가슴이 뛰는 일’을 선택해 새로운 도전을 펼치기로 했다.
“은퇴 앞두고 여러 제안을 받았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는데 2024년 플레잉 코치로 2군 선수들과 함께하며 지도자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지도자로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지난 11월 정도에 결심을 굳혔다.”
정우람이 은퇴 후에도 한화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로 한 배경에는 은퇴식을 만들어준 구단의 배려와 정성도 한몫했다.
“내가 한화의 ‘원클럽맨’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아주 성대하게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감동의 은퇴식을 치르게 해줬다. 동료 선수들 그리고 많은 팬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음껏 울 수 있게 해준 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정우람의 은퇴식에는 전광판을 통해 정우람의 선수 생활 마지막을 응원하는 축하 영상들이 소개됐다. 두산 양의지와 김재호, SSG 김광현, 롯데 전준우와 오선진, 삼성 강민호 등 타 구단 선수들을 비롯해 장민재, 김서현, 이재원, 이태양, 박상원, 류현진 등 팀 동료 선수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양의지하고는 2015년 프리미어12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도 배터리를 이뤘다. 평소 상대 팀 투수로서 포수 양의지가 궁금했는데 실제 경험해보니 (양)의지가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으면 장타를 안 맞을 것 같은 기대 심리가 존재하더라. (양)의지가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많지 않나. 그 경력과 실력이 엄청나다는 걸 배터리를 이루며 실감했는데 은퇴식 응원 영상을 남겨줘서 정말 고마웠다.”
은퇴사를 한 달 동안 준비했다는 정우람. 방송작가 출신인 아내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를 꼭 넣어야 한다고 조언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성심당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대전에 두 가지 명물이 있는데 하나는 성심당이고, 또 하나는 한화 이글스 팬들이라고. 선수들 이름도 일일이 다 열거하며 나름의 메시지를 담았다. 나중에 구단에서 너무 길다고 잘랐지만 말이다. 선수들, 특히 고참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싶었다. (FA로) 돈 많이 받고 온 선수들도 잘해야 하고, 높은 순위로 한화 유니폼을 입은 신인 선수들도 잘 성장해야 한다. 난 그 선수들이 잘 올라설 수 있도록 뒤에서 도울 것이다.”
정우람의 은퇴식에는 SK와 한화에서 인연을 맺은 김성근 감독도 축하 영상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정우람은 김성근 감독에 대해 “감독님은 야구선수 정우람이 아닌 인간 정우람을 바꿔주신 분”이라고 지칭한다.
“김성근 감독님은 기술적인 훈련으로 나를 바꿔주신 분이 아니다. 인간 정우람의 잠재의식과 능력을 끌어내 주신 분이다. 스물세 살에 (SK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감독님 눈에 들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감독님도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의 최대한을 뽑아내 주셨다. 덕분에 야구에 자신감이 생겼다. 혹독한 훈련량으로 한때는 감독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걸 승리로 다 보상 받았다. 프로는 결국 참고 인내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김성근 감독님은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 연세에 하루 10시간, 12시간씩 펑고 쳐주면서 선수들을 독려할 수 있는 지도자가 몇 명이나 있겠나. 그분은 야구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야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야구의 스승님이다.”
정우람에게 김성근 감독 외에 함께하고 싶었던 감독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정우람은 롯데 감독을 역임한 제리 로이스터란 이름을 꺼냈다. 김성근 감독과 정반대의 훈련 방법을 선보인 로이스터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면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을지 궁금하다는 흥미로운 대답을 덧붙였다.
정우람의 은퇴식에는 두 아들과 아내도 함께했다. 야구선수의 아내로, 두 아들의 엄마로 내조와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아내 최은진 씨는 방송작가 출신이다. 2009년 OBS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2’ 촬영 당시 방송작가와 선수로 만났다가 당시 SK 선배였던 이호준 NC 감독의 주선으로 데이트를 했고, 1년여의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이호준 선배가 촬영하면서 아내를 괜찮게 봤던 것 같다. 아내에게 관심 있는 선수가 누군지 물었고, 내 이름이 나오자 나한테도 의향을 묻더니 아내 연락처를 넘겨주시더라. 그래서 사귀게 됐다. 나 말고도 아내한테 관심을 나타낸 선수들이 많았다. 비밀 연애 중이라 선수들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걱정하고 질투하고 그랬다.”
정우람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전화 연결이 된 이호준 감독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서로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적극 나섰다”라고 설명했다.
“1년 정도 지나서 정우람이 결혼한다고 말했는데 정작 주선한 나한테는 정장 한 벌 안 사줬다. 저가 양복도 충분히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이호준 감독 특유의 농담에 깜짝 놀란 정우람은 “감독님, 제가 그때는 너무 어려서 아무 것도 몰랐다”며 거듭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
이 감독은 올 시즌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는 정우람에게 “지도자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정우람 코치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잘해낼 거라 믿고 응원하고 싶다”라고 덕담을 건넸다.
21년 프로 생활 중 정우람이 가장 잊지 못할 시기는 언제일까. 그는 SK 시절인 2008년 시즌 초반을 꼽았다.
“2007년 SK가 우승을 했을 때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 엄청난 좌절감을 느끼고 시즌 끝났을 때부터 스프링캠프 때까지 정말 많은 공을 던지며 훈련을 거듭했다. 2008시즌 초반 LG전에 등판해 스프링캠프에서 갈고 닦은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타자들이 전혀 대응을 하지 못하더라. 그때 내 체인지업에 확신과 자신감이 생겼다. 올해 무조건 우리 팀 우승 시키고, 많은 경기에 나가 내가 좋은 투수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내 노력과 의지를 김성근 감독님이 높게 평가해주셨다. 덕분에 그해 홀드왕을 차지했다.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정우람도 천적이 있었다. 김선빈(KIA), 허경민(KT) 등은 정우람의 은퇴를 아쉬워할 선수들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선수들을 잡기가 어려웠다. 대신 내가 잡아야 할 선수들은 반드시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나를 많이 상대하지 않았던 타자들이나 타격감이 떨어지는 선수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선수들은 확실히 잡겠다는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그 선수들을 잡지 못하면 경기 운영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불펜 투수들은 ‘혹사’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정우람은 자신의 야구 인생을 돌아보면 혹사를 한 시간도 분명 존재한다고 고백한다. 대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았고 팬들한테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 야구를 했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다고 설명했다.
“혹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일일이 투구 수를 세고 관리받으며 야구하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기회를 받고 마운드에 오를 수 있는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수술한 적도 없고 두 차례의 FA를 경험했고 돈도 벌었다. 그래서 나한테 혹사는 아픔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과 내가 감당한 환경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한테 혹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우람은 2025년 한화 이글스 잔류군 코치를 맡을 예정이다. 선수 시절 한화 팬들에게 우승할 때까지 은퇴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는 그 약속을 코치가 돼서 후배들 육성과 성장을 도우며 꼭 지켜내고 싶다는 의지를 다진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
하주석·이용찬·서건창…'FA 미계약자' 앞날은
온라인 기사 ( 2024.12.27 14:15 )
-
1000만 달러 이하 조건도…김혜성 포스팅 제안 받고도 고민 깊은 이유
온라인 기사 ( 2025.01.03 16:55 )
-
[인터뷰] 지도자 길 걷는 정우람 "해설위원 제안도 받았지만 가슴 뛰는 일 선택"
온라인 기사 ( 2025.01.03 15: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