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에 따르면 국회 몫의 재판관은 국회가 ‘선출’하는 것이고, 국회에서 선출되면 대통령은 재판관을 그냥 임명하는 것이다. 국회가 선출한 재판관에 대해 대통령은 임명하지 않을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임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 대행은 국회가 선출한 마은혁 재판관 임명을 보류했다.
그 자체로 월권인데, 거기까지도 힘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누가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바삐 마 재판관을 임명해서 헌재가 완전체로 작동되기를 바란다.
요즘 전국민이 헌법을 공부하고, 형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 일상적으로는 법이 끼어들어 행복할 일이 많지는 않다. 법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행복한 공동체다. 그것은 상식이 통용되고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법의 정신은 그런 곳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법 조항 뒤에 숨어 잘못한 것 없다고 우기는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들, 별 일도 아닌데 법 조항을 들이대며 너도 이런 잘못을 하지 않았냐며 발목을 잡는 비열한 사람들을 우리가 ‘법꾸라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법 조항은 있는데 법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공동체에서는 판관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 안셀름 그륀 신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판관 드보라를 설명하면서 판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판관은 모두에게 올바른 관계를 정립한다. 틀어진 것을 바르게 하고, 굽은 것을 곧게 편다. 무엇이 사람을 돕고, 무엇이 해치는지 직관적으로 판단한다.”
드보라는 여판관의 원형이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칭송받는 이 여인은 일종의 야외법정인 야자나무 아래서 참과 거짓을 판단했다고 한다. 안셀름 그륀은 ‘여왕과 야생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녀가 지도자로 선출된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위기에 처해 누구도 목숨 걸 각오를 하지 않았을 때 지도자의 임무를 맡았다.”
탄핵 정국에서 빛났던 것은 바로 그 드보라들이었다. 공동체가 위기를 맞자 틀어진 것을 바르게 펴겠다는 일념으로 광장에 모인 그들은 공동체의 주인이었고, 미래였고, 그럼으로써 현재의 힘이었다. 그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아파트’를 부르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촛불시위 때부터 우리 공동체는 비폭력 저항의 힘을 보여줬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시위는 단순히 비폭력 저항을 넘어 우리가 공동체임을 확인해주는 축제가 되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 세대인 우리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들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기꺼이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응원봉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음을 확인해준 에너지였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울타리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일이 일상이 된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비행기 사고로 그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심정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한순간에 세상을 떠난 외로운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들은 성숙했다. 깊은 상실, 깊은 슬픔을 겪고 있는 영혼들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느끼며 응원봉을 내려놓고 검은 리본을 단 것이다. 이들이 있는 한, 이들과 함께하는 남성들이 있는 한, 이들을 격려하는 어른들이 있는 한 여기저기서 흔들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대한민국은 다시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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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