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살던 집 주택 관리 과정 서류위조 혐의…재판부 ‘일반인에게 법적 전문성 요구 무리’ 판단
정태영 부회장의 고소로 시작된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정은미 씨와 A 씨를 위계공무집행방해와 사문서위조방조 혐의로 기소했으나 2심에서도 정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무리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정은미 씨는 2020년 11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주택 용도변경 신청을 위해 A 씨를 알게 됐다. 종로구 주택은 부모님이 살던 집으로 아버지 고 정경진 종로학원 회장, 정태영 부회장, 차남 정해승 씨, 정은미 씨 등이 공동으로 소유한 건물이었다. 정태영 부회장이 여동생 정은미 씨를 서류 위조 혐의로 고소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재판부는 정은미 씨가 용도변경 과정에서 다른 공유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정 씨는 건축물 용도변경 업무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이었고, A 씨와 통화에서도 동의 필요 여부에 대해 명확한 안내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 인정됐다.
당시 통화에서 정 씨가 “용도변경은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건가요?”라고 묻자 A 씨는 “공유자분 전체가 다 주민등록번호가 같이 들어가거든요”라고 답했고, 정 씨가 재차 “그래도 동의를 받아야 되나요?”라고 묻자 “동의보다도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되는 거예요”라고 답변했다.
2심 재판부는 “녹취록을 보면 A 씨가 피해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며 “정 씨가 동의 필요성을 명확히 파악하려 노력했음에도 A 씨의 답변은 오히려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표현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재판부는 “정 씨가 교육서비스업 회사와 사회협회사에서 대표이사와 사내이사로 근무했다고 해서 건축사에게 위임해 처리하는 공유 부동산 용도변경 업무 절차를 파악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가 정은미씨로부터 의뢰받은 공유 부동산 용도변경 업무를 수행하면서 업무상 편의를 위해 공유 명의자인 피해자들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피해자들의 인장을 위조해 행사한 것은 죄질이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A 씨가 확정적 고의 없이 정은미 씨와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착각으로 범행이 이뤄졌고, 용도변경 업무 수행의 대가로 받은 보수가 통상적인 수준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초범인 점과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점 등을 고려해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측이 제기한 행정소송 판결도 언급했다. 정 부회장과 용문장학회는 서울 종로구청을 상대로 해당 건물의 용도변경 허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행정소송에서 1심은 ‘용도변경 허가 신청이 처분 대상이 되는 것으로 오인할 만한 객관적 사정이 있다’며 정 부회장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2심에서 판단이 뒤집혔다. 2023년 1월 행정소송 항소심 재판부는 “해당 건물의 용도변경은 공유자 전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공급률 변경에 해당한다”고 판시하며 정 부회장 측 손을 들어줬다. 이 행정소송의 결과는 정은미 씨의 형사사건에서도 고려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사건 재판부는 무죄 배경으로 “건축물 용도변경을 공유물의 변경 행위로 볼 것인지는 민법상 판단이 필요한 전문적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행정소송에서도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던 만큼 건축 관련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인인 정은미 씨가 공유자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았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는 정 씨에 대한 무죄 판결의 또 하나의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같은 사안을 두고 행정소송에서조차 법원의 판단이 달랐던 점을 감안할 때 일반인인 정 씨에게 법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결과적으로 검찰 측이 주장한 정 씨의 고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정은미 씨를 변호한 유지원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무리한 기소이자 무리한 고소의 사례”라며 “명확한 녹음 파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고소와 검찰이 대기업 회장 측 로펌의 의견을 그대로 답습해 기소를 강행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 변호사는 “건축사 사무소 직원과 통화에서 정은미 씨가 ‘동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고, 상대방이 ‘주민등록번호만 있으면 된다’고 답변한 내용이 녹음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 씨가 사인 위조를 교사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유 변호사는 검찰의 수사와 기소 모두 무리했다고 지적했다. 유 변호사는 “검찰이 건축사 사무소 직원이 정 씨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당시에는 이런 고소가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도 못 했던 상황인데, 그럼 건축사 사무소 직원이 거짓말을 하는 녹음이나 서류를 만들어 놓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유 변호사는 “검찰이 여러 명에게 무차별적으로 연락해 ‘정은미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고, 과거 법무사 사무실이나 건축사 사무실 등에서 업무를 봤던 사람들을 증인으로 부르겠다고 했다”며 “이는 명백한 과잉 수사”라고 지적했다.
유 변호사는 “항소심에서도 피해자 측(정태영 부회장 측)은 여러 차례 서면을 제출하고 증인 신청을 했으며 검사가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며 “검찰이 마치 대기업 측 대리인처럼 행동하며 피해자 변호사 의견서를 그대로 인용해 공소 유지에 나섰다”고 비판했다. 특히 유 변호사는 “이 사건은 사회적 법익을 해하는 죄로 기소된 것이라 원칙적으로 피해자가 있을 수 없는 사안임에도, 이처럼 피해자 측의 의견이 과도하게 반영된 것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현대카드 측은 이번 2심 선고와 관련한 정태영 부회장 입장을 묻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현대카드 측은 ‘부회장 개인적인 일이라 회사 차원에서 답변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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