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한동 작가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베스트셀러 올라…“호치키스 행정이 가짜 노동 세계로 이끌어”
노한동 작가는 2023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 서기관으로 승진과 동시에 공직을 떠났다. 2024년 12월, 1년여의 집필 끝에 10년 공직생활을 담은 저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 한국 공직사회는 왜 그토록 무능해졌는가’를 출간했다. 201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대학 재학 중에 공직에 입문한 그는 청와대 발령이 예정돼 있었음에도 공직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다.
대부분 퇴직 관료들이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거나 미화하는 회고록을 쓰는 것과 달리 그는 냉철한 비판의 시선으로 관료제의 민낯을 드러냈다. 이 도발적인 시도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출간 2주 만에 4쇄를 찍었고, 현재는 베스트셀러에 올라 책이 품절될 정도로 독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1월 15일 이제는 작가가 된 노한동 씨를 만나 한국 관료제의 현실과 과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4급 승진, 청와대 발령이라는 괜찮은 조건을 받았음에도 공직을 떠났다. 이유가 있나.
“10년 동안 겪었던 무력감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쌓여 있었다. 저작권 분야에서 승진했는데 이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사 원칙상 ‘여기가 비었으니 가라’는 식의 순환보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래가 전혀 기대되지 않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 인생 자체를 망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얘기는 내 개인 차원 문제가 아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무원은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어렵게 들어간 공무원을 다 그만두려고 아우성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도 그렇고, 내가 본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중 70%가 ‘이직 의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외부에서 봤을 때 언론에서 분석할 때는 ‘처우가 안 좋아서 그렇다’ 혹은 ‘세종시로 보내서 그렇다’ 등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내가 안에서 볼 때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효능감 자체가 떨어지는 구조가 있다. 그것을 르포적으로 경험을 복원해서 공감을 얻고 싶다는 생각에 책도 쓰게 됐다.”
—떠나는 이유가 뭔가.
“너무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짜 노동’ 얘기를 하고 싶다. 공직 사회에 켜켜이 쌓여 있는 관행들이 있다. 이른바 ‘현장 간담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이해할 거다. 고위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한다고 하면, 실제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일종의 ‘연극’을 준비한다. 미리 각본을 짜고, 질문할 사람, 답변할 사람을 정해두고, 심지어 박수 치는 타이밍까지 정한다. 현장 점검이 실제 현장을 보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된다.
또 ‘호치키스 행정’이라고 해서, 실제로 내용을 검토하고 분석하기보다는 여러 문서를 단순히 물리적으로 취합해서 보고하는 관행도 있다. 두꺼운 보고서를 만들어 올리면 뭔가 일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서만 많이 모았을 뿐,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나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관행들이 공무원들을 ‘가짜 노동’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실질적인 성과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정작 해야 할 일은 밀려 있는데 이런 가짜 일들 때문에 시간을 뺏긴다.”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태가 공무원의 면피 문화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썼다.
“블랙리스트 사태가 잘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사건이 계기가 됐다는 거다. 내부의 시각, 외부의 시각이 있을 수 있는데 내부에서 보면 블랙리스트를 실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 사람이 이념적으로 어떤 확신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그런 지시를 받았고 거부하거나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부에서는 ‘자기가 성공하려고 해놓고 나중에 치사하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고 하지만 꼭 그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월급 받는 직장인이다. 월급쟁이가 일하다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면 위험과 보상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걸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나’, ‘면피할 만한 뭔가를 남겨놔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책에는 문서주의에 대한 비판에도 상당 부분 할애했다.
“공무원 사회에서 보고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한 장에 예쁘고 간결하게 담아라’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해야 한다. 복잡한 현실의 실타래가 두세 가지 원인과 해결방안으로 단순화하면, 보고서는 읽기 좋아지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워진다. 국장급 이하에서는 완결된 형태의 보고서를 요구하는 걸 없애야 한다. 지금은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 논의해볼 만한 보고서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무관이 보고서를 올릴 때는 원인부터 해결방안까지 한 번에 완결되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보고 뭘 하라는 거냐’는 식의 반응이 돌아온다. 우선 개조식으로만 쓰지 말고 서술형으로도 써보는 걸 고려해볼 만하다. 선진국 공무원들은 서술형으로 많이 쓴다. 장관 중에서는 ‘OTT’를 모르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도 계셨다. 이들을 위해 어려운 용어를 쉽게 쓰라고 하는데, 사실 너무 단순화하면 안 된다. 장·차관님들 공부해서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한 장짜리 보고서 문화는 장·차관들의 바쁜 일정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맞지만, 이건 결과와 원인이 뒤바뀐 것 같다. 장·차관이 왜 바쁠까. 바쁜 이유를 보면 정작 국회 업무나 정책 결정 같은 필수적인 일보다 ‘얼굴마담’ 역할 때문인 경우가 많다.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현장 간담회 가고, 하루에 행사를 다섯 군데씩 도는 경우가 흔하다. 이분들이 이렇게 바쁘시니까 한 장짜리 예쁜 보고서를 요구하는데, 이걸 거꾸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필요한 의전성 행사나 형식적인 현장 방문을 줄이고, 그 시간에 차라리 실무자들과 앉아서 현안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보고서 한 장에 모든 걸 담으려고 애쓰기보다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국장이 세종시에 와서 1시간 자리에 앉으면 보고하려고 줄을 선다. 그 1시간 동안 사무관, 서기관 10명의 보고를 받으면 남는 게 있나.”
—업무 효율성 저하 이유로 세종시 이전을 많이 꼽는다.
“세종시 이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어진 상수다. 세종시로 이전한 지 10년이 지났다. 하지만 업무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급수가 세종에 있는 날’이라는 말이 있다. 1급은 일주일에 하루, 2급은 이틀, 5급은 5일…이런 식이다. 장관이 서울에 있으면 국장도 장관에게 보고해야 하니 서울에 있어야 한다. 장관이 서울에서 행사를 줄이고 세종으로 더 많이 내려오든 아니면 사무관들에게 보고서 작성보다 현장 활동을 강조하든, 주어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업무 방식을 찾았어야 했다. 지금처럼 과장, 국장은 계속 길에서 시간을 보내서 ‘길과장’, ‘길국장’이라는 말이 생겼고, 사무관은 컴퓨터 앞에서 보고서만 쓰게 하는 건 문제가 있다.”
—국회 대응이 공무원들의 가장 큰 업무 부담 중 하나로 꼽힌다.
“맞다. 공무원 업무 70%가 보고서 작성과 국회 대응인데, 특히 국회 상임위 준비 과정이 비효율적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열리는 상임위 때문에 전 부처가 뒤집어진다. 상임위 전날이면 의원실마다 다니면서 다음 날 질문할 내용을 수거해온다. 저녁 6시부터 시작해서 밤 11시, 12시가 돼야 자료가 나오기 시작해 과장, 국장, 실장 보고를 거치면서 새벽까지 작업이 계속된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이미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 준비돼 있다는 거다.”
—이런 관행이 계속되는 이유는 뭔가.
“표면적으로는 ‘장관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상임위에서 장관이 버벅대면 안 된다는 거다. 하지만 실상 이건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라는 관성에 가깝다. 차라리 국회에서 예상 질의를 아예 안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실질적인 정책 논의는 뒷전이고, 이런 형식적인 절차에만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 거기다 국회 측의 자료제출 요구도 도가 지나친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의원과 보좌관들이 많은데, 이건 단순히 제도나 법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회가 문제를 ‘던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해결하자’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책에서 순환보직 제도의 문제점도 꼬집었다.
“한 부처 안에 국이 10개 정도 있고, 하나의 국 안에 과가 3~4개가 있다. 핵심은 승진 구조다. 일과(첫 번째 과)에 있으면 승진이 잘되고, 말과에 있으면 승진이 어렵다. 아이러니한 건 일과는 주로 기획조정 업무를 담당하는데 실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오히려 말과라는 점이다. 하지만 승진을 위해서는 결국 기획조정 쪽으로 가야 한다. 순환보직은 한 곳에 오래 있어 고인물이 되는 걸 막아 부패를 방지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문성 개발이 심각하게 저해된다. 말과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사람도 승진을 위해 일과로 가야 하고, 결국 정부 내에서 한 분야의 전문가를 키워내지 못한다. 전문가들이 정부, 국회, 기업, 학계를 오가면서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데, 그 출발점인 정부부터 전문성이 쌓이지 않는 것이다.
해결책은 있다. 모든 직원이 순환보직을 돌 필요는 없다. 한 분야에서 진득하게 전문성을 쌓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승진이 조금 늦더라도 전문가로 성장해서 민간이나 학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는 부패 방지라는 순환보직의 본래 취지와 전문성 확보라는 새로운 요구를 조화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최근 정책 집행을 외주 주는 일이 늘어났고, PMO(Project Management Office, 프로젝트관리조직) 업체도 크게 늘었다. 관료로서 보기에 어떤가.
“외주 업체를 끼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다. 공공기관들이 실제로는 더 전문가다. 저작권이면 한국저작권위원회, 체육이면 국민체육진흥공단, 출판이면 출판문화산업진흥원처럼 각 기관 직원들은 20~30년씩 그 분야에서 일하면서 전문성을 쌓았다. 근데 여기서 또 한 단계를 넘어가서 컨설팅 업체를 끼우면 일이 쉬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산 낭비가 발생하고 전문성도 쌓이지 않는다. PMO를 두면 서류를 100개 다 받아야 할 걸 업체 측이 처리해주니 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결과적으로 공공부문 내부의 전문성과 암묵지(경험과 학습에 의해 몸에 쌓인 지식)가 쌓이지 않는다. 이런 식의 외주화는 단기적으로는 편해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공부문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많은 정책 실패 사례를 보면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외주 업체의 보고서에만 의존한 경우가 많다.”
—정부 조직이 가진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했다.
“‘역방향 인센티브’ 구조가 가장 큰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는 실패할수록 더 큰 조직이 된다. 예를 들어 저출산 문제를 보면 저출산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 문제가 지속되는 게 예산 확보에 더 유리한 상황이 된다. 민간 영역과 비교하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못 만들면 SK하이닉스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하지만 환경부가 환경 업무를 제대로 못한다고 해서 그 기능을 다른 부처가 가져가거나 없앨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잘하라’며 예산과 인력을 늘려준다.”
—예산 운영 시스템 문제도 크다고 했다.
“기재부의 예산 심의 과정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담당자 한 명이 체육 분야 예산 1조 6000억 원을 도맡는데 세부 사업이 1000개 가까이나 된다. 한 사람이 이걸 다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전년도와 같은 예산은 거의 검토하지 않고 증액되거나 새로 생긴 사업만 들여다본다. 더 큰 문제는 예산 절감에 대한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문체부는 현재 전체 예산의 1% 초반을 차지하는데, 목표는 2%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예산을 줄이려고 하겠나. 더 효율적으로 쓰거나 줄여서 절감했다고 해서 칭찬받을 일도 없다. 그러니 모두가 예산 늘리기에만 집중하게 되는 거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행정학자들도 정부의 ‘역방향 인센티브’ 구조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올해 성장률이 1.9% 정도다. 저성장 시대에는 무조건 예산을 늘리는 게 좋다는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각 부처에 총액을 주고 그 안에서 재구조화하도록 하는 총액예산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미 국가재정법에 ‘총액배분자율편성제도’가 있다. 기재부가 총량만 정해주면 각 부처가 알아서 예산을 쓰도록 한 제도다. 현실에서는 기재부가 일일이 따져보며 미시적으로 사정하고 있다. 법대로만 해도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총량만 정해주고 부처가 자율적으로 운영하면, 현장을 잘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 곳에 예산을 쓸 수 있다. 지금처럼 기재부 담당자를 설득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다. 예산 절감이나 효율적 운영에 대한 인센티브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부처의 자율성부터 보장해야 한다.”
—각종 구조적 문제가 쌓이고 있지만, 소위 ‘정책 효능감’이나 정부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활로를 뚫어줘야 하는 묵은 과제가 많은데, 문제 해결보다 그냥 덮어두고 있다. 스포츠토토를 예로 들어보자. 토토는 5조 8000억 원 매출이 나오는데, 불법 도박은 21조 원으로 추정돼 4배 규모다. 이런 규모를 보면 단속과 교육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미국은 베팅을 합법화했다. 우리나라도 합법 영역을 넓혀 불법 시장의 일부를 흡수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프로스포츠 산업과도 직결된다. 야구만 봐도 400억 원 쓰면 200억 원 버는 구조다. KBO 총재가 아무리 잘해서 경기장을 만석으로 채워도 해결이 안 된다. 입장 수입이 전체의 10%밖에 안 되고, 미디어 중계권도 네이버, 카카오, 공중파 등이 더 이상 돈을 주기 어렵다. 프로스포츠의 자립성은 결국 스포츠토토와 베팅 영역을 얼마나 합리적으로 넓힐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도박을 조장한다’는 도그마 때문에 아무도 시도조차 못 한다. 국회의원들은 여론에 취약해서 전화 몇 통만 받으면 후퇴한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가짜 노동으로 일이 많아 공무원들이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추진하면 언론의 공격을 받고 국회의원들이 ‘도박 합법화하자는 거냐’며 압박하는데 이를 막아줄 보호막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가 핵심이다. 정부에 권한을 주고 책임지게 하든지, 아니면 국회나 시민사회가 권한과 책임을 가져가든지 해야 한다. 발전국가 시대 트라우마 때문에 정부 주도를 꺼린다면 누군가는 이 일을 책임지고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권한은 밖에 있고 책임만 정부가 지는 구조로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나는 아직은 권한을 주면 관료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한을 준다는 걸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단순히 제도나 법을 바꾸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법안 하나를 바꾸려고 해도 상임위 20개 의원실을 다 돌아다녀도 안 되는 구조다. 이걸 바꿔서, 여당 간사와 야당 간사만 설득되면 법안이 통과될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또 다른 측면은 문화의 변화다. 언론이 비판하고 때려도 청와대나 대통령실에서 ‘너희들 무슨 짓하느냐’며 바로 제동을 걸지 않고, 합리적인 설명이 있으면 ‘한 번 해보자’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이건 특정한 제도나 규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이야기다. 결국 ‘권한을 준다’는 건 공무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모든 걸 일일이 보고하고 승인받는 구조가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 있으면 그걸 밀고 나갈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의 권한이다.”
—듣다보니 켜켜이 쌓인 관행과 문제로 인해 해결이 멀어 보인다. 답이 있다고 생각하나.
“우선 문제가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마치 아픈데도 병원에 안 가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처럼, 지금 공직사회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진단을 받아야 처방이 나올 수 있는데 그 첫 단계가 안 되고 있다. 해결책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보고서 문화만 해도 국장급 이하에서는 지나치게 예쁜 보고서 작성에 집착하지 말자고 하면 된다. 순환보직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직무군을 잘 설정해서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게 하면 된다. 기업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미국만 봐도 100대 기업이 10년만 지나면 절반 가까이 바뀐다. 그래서 경직성이 생기면 ‘우리가 안 바꾸면 밀린다’는 생각으로 계속 혁신한다. 하지만 정부는 그런 생각이 없다. ‘하던 대로 하자’, ‘보고서 쓰던 대로 쓰자’, ‘너만 불만 갖지 마’라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권이 우리 편으로 바뀌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은 저쪽을, 저쪽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쪽을 욕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관료 시스템의 문제는 누가 와도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문제는 계속 심각해지기만 했다. 내가 직접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를 겪어봤는데 다 똑같았다.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다. 이 책을 보고 ‘저 사람이 대통령실 발령 듣고 퇴직했다고 하니, 이 정부가 문제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이건 정파적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정부가 들어와도 해결되지 않을 구조적인 문제다. 장관이 누가 되든, 어느 당 소속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를 폭로하거나 특정 세력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공직 사회의 이 태만한 무능을 사무실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한테 복원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야 이게 정파적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하는 더 근본적인 과제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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