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간 통화 내용 유출 발칵, 오랜 병폐 고스란히…‘슈퍼스타’ 왕톈 등 선수·감독 대규모 연루 ‘영구 퇴출’
2023년 4월경 인터넷과 SNS(소셜미디어)에선 장기선수들의 통화 녹음 파일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목소리 주인공은 장기 대가들인 왕웨페이와 하오지차오였다. 통화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승부조작, 소프트웨어 불법 거래 등 소문만 무성했던 부조리가 담겨 있었다.
특히 대화엔 ‘왕톈’ 이름도 거론됐다. 그는 지난 10년간 전국 1위를 기록한, 중국 장기의 절대 강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열성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고, 천문학적 수입을 벌어들이는 장기계 슈퍼스타다. 인터넷 등에선 대화 녹취록이 빠르게 퍼졌고, ‘녹음 게이트’라는 사건으로 불렸다.
처음엔 헛소문으로 일축하던 장기협회는 2023년 7월 자체조사에 착수했다. 2023년 8월 왕톈은 ‘건강상의 이유’로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녹음 게이트에 연루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파다했다.
대화를 녹음한 건 베테랑 장기선수인 류다화로 밝혀졌다. 1950년생인 류다화는 중국 장기계에서 신화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장기를 배운 이후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류다화는 “(대화를 듣고) 장기의 미래 발전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장기 환경을 개선해 새로운 세대의 기사들이 바통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녹음을 제보하게 됐다”고 말했다.
장기협회는 2024년 4월 공안에 수사를 의뢰했고, 2025년 1월 12일 국가체육총국 기율검사위원회 서기 가이홍옌은 ‘녹음 게이트’ 사건 조사 상황을 정식으로 보고했다. 가이홍옌은 “워낙에 관련자가 많고, 오래 전부터 쌓여있던 문제점들이어서 조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기선수들은 전국 대회에서 경기 결과를 미리 사전에 정하고, 도박 사이트에서 ‘베팅’을 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브로커를 통해 상대편 동료를 매수해 승리, 승급을 한 선수들도 있었다. 선수뿐 아니라 감독들 중에서도 팀 성적을 위해 불법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가이홍옌은 이번 사건의 몇 가지 특징을 설명했다. 첫째 법 위반 행위가 오랫동안 있었다.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3년까지 10년 넘게 이뤄졌다. 둘째 사건에 연루된 인원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선수, 감독, 브로커 등을 합하면 수백 명에 달했다.
마지막은 매우 은밀하게 벌어졌고, 이를 숨기려 온갖 방법이 동원됐다. 선수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 승부 조작 등을 논의했다. 또 지인이나 친척의 계좌로 돈 거래를 했다. 경기장에서 직접 현금을 주고받았던 사례도 적발됐다.
가이홍옌은 “수법이 악랄하고,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면서 연루된 선수들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출전정지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왕톈, 왕웨페이 등 주요 선수들은 앞으로 중국에서 열리는 모든 장기 시합에 평생 참가할 수 없다. 왕톈은 협회로부터 받은 ‘마스터’ 자격도 빼앗겼다. 최근 10년간 장기 순위 상위권에 오른 선수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 징계 조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왜 이처럼 나쁜 길로 빠져들었을까. 10년여 전부터 인터넷을 통한 대국이 활성화되면서 장기 시장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각종 프로젝트와 이벤트가 열렸고, 전국 단위 대회도 늘어났다. 대회 상금 규모도 그만큼 커졌다. 그러다보니 순위 경쟁이 치열해졌고, 각종 도박 등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소재 법률사무소 변호사이자 프로 장기선수인 차이이는 “프로팀에 속한 적이 있었다. 성적 압박이 엄청났다. 팀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실적을 올려야 하고, 또 정해진 기간에 순위를 올려야 한다”면서 “프로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퇴출된다. 이 때문에 시합을 앞두고 순위 조작 등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한 프로 장기선수도 CCTV 익명 인터뷰에서 “순위, 등급 등에 따라 대국료는 큰 차이가 난다. 또 어떤 팀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그렇다. 순위가 낮은 기사들은 순위를 올리려고, 또 높은 기사들은 그것을 유지하려고 불법이나 편법을 동원할 때가 종종 있다”고 고백했다. 실제 이번 진상조사 결과를 보면 정상급 기사부터 무명의 최하위급 기사까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장기협회 측은 “선수들과 코치들의 위반 행위는 장기 발전과 신뢰성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면서 단호히 처벌하고 무관용 원칙을 적용할 것이라고 했다. 장기협회 관계자는 “장기 업계 종사자들이 이번 사례를 거울로 삼아 법과 기본을 지킬 수 있도록 협회에서도 노력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중국=배경화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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