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은 미국 밖으로 나가는 달러를 늘리기보다 전 세계의 달러를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방향이다. 1월 들어 달러 인덱스(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는 110선까지 근접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이 정점이던 2022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달러가 강세면 원화는 약세다.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보편 관세 시행이 일단 유보되면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직후 원·달러 환율은 꽤 떨어졌다. 그래도 강 달러의 큰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지난 1월 16일 한국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한 기준금리 인하를 1월에는 하지 않기로 했다. 환율 상승에 따른 물가 불안이 이유다. 한은의 최대 임무는 경기부양이 아닌 물가 안정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가 취임 100일 이내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날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신속하게 대중국 정책의 기본 틀을 짜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양국 간 무역전쟁의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 중국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미국의 관세 장벽에 위안화 약세로 대응했다.
우리 경제는 여전히 중국과 깊이 연결돼 있다. 위안화와 원화의 움직임은 비교적 일치한다. 위안화가 약세를 보일수록 한국의 금리는 떨어지기 어렵다. 금리가 하락하지 않으면 경기 회복도 요원해진다.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은 1%대 중반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내년에도 1%대가 예상되는 ‘저성장의 늪’이다. 성장률로만 보면 외환위기 이후 가장 심각한 상황이다. 경기가 부진해 소득은 늘지 않는데 대출금리까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주택 수요가 되살아나기 쉽지 않다.
이미 국내 주택시장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이 최근 발표한 ‘1월 둘째 주(13일 기준) 전국 주간 아파트가격 동향’을 보면 서울 아파트 가격은 전주 대비 0.0043% 하락했다. 지난해 3월 넷째 주 상승세로 돌아선 이후 9개월여 만에 ‘마이너스(-)’ 전환이다. 전국 아파트값도 전주보다 낙폭을 키우며 0.04% 하락했다. 매매 선행지표인 전세가격도 전국 기준 -0.01%로 하락 전환했다. 2023년 7월 이후 1년 6개월 만이다.
최근 은행들이 금리를 낮춰 주택담보대출 공급을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수요를 자극할지는 미지수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로 이미 한도까지 차입을 한 가계가 많다. 7월부터는 사실상 대출 한도를 더 줄이는 스트레스DSR 제도까지 확대 시행된다.
그나마 추가 차입이 가능한 중산층 이상 부자들의 수요를 자극하려면 거래량이 수반돼야 한다. 지난해 7월 9218건이던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지난해 9~11월 3개월째 3000건대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12월 거래량도 3000건 안팎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월 19일 KB부동산이 발표한 서울 아파트 매수우위지수는 35.4로 전주(35.7)보다 0.7포인트 하락했다. 서울 집값이 고점을 찍은 지난해 7월 넷째 주(72.1)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매수우위지수는 0부터 200까지인데 100 미만이면 집을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거래를 자극하려면 공급이 필요하다. 아파트는 착공에서 입주까지 최소 3년 정도가 걸린다. 2022년에 착공해야 올해 입주가 가능하다. 아파트 착공 물량은 2019~2021년 3개년 평균치에 비해 2022년 29% 정도 줄었고 2023년에는 무려 53%나 감소했다. 2024년에도 11월까지 46%가 줄어들었다. 공급 부족은 당분간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다.
올해도 공급이 늘어나기는 쉽지 않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정리는 아직 요원하다. 금리와 환율 부담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건설 원가는 치솟고 있는데 DSR 한도는 거의 다 찼고 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경기가 되살아나야 부동산 시장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상황이다.
한은은 1월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정부의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을 주문했다. 정치권에서도 추가경정예산 편성 목소리가 나온다. 경기 부양의 시기와 규모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여부가 확정돼야 가늠할 수 있다. 현 정부든 새 정부든 은행들에 가산금리 인하를 주문하려고 해도 정치 상황이 정리된 후에야 실효를 기대할 만하다. 빨라야 하반기다. 결국 중요한 것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담판 결과다. 일단 채권시장에서는 트럼프가 당초의 엄포보다는 완화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남아 있는 모습이다.
항공·배터리…'트럼프발 환율 불안'에 떨고 있는 업종들
국내 기업들도 트럼프발 환율 불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자칫 빚더미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환율이 오르면 수출 가격경쟁력이 높아진다. 보호무역으로 관세가 높아지면 수입품의 가격경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남는 것은 수입물가 상승과 외화채권 부담이다. 환율 상승이 전혀 반갑지 않은 기업들이 상당하다.
국제금융센터가 집계한 올해 한국계 외화채권 만기도래 예상액은 약 497억 달러다. 지난해 416억 달러보다 20%나 많아 2020년 이후 최대치다. 환율이 오르면 그만큼 상환 부담이 늘어난다. 차환 발행을 해도 이자를 높여줘야 한다. 특히 최근 한국 기업들은 금리가 낮고 달러화 대비 약세인 일본 엔화로 자금을 조달하는 사무라이본드 발행을 크게 늘였다. 일본은행은 최근 기준금리 인상 계획을 밝혔다. 엔화가치가 상승하면 엔화를 갚기 위해 더 많은 원화가 필요하다.
외화 빚 부담이 가장 많은 업종은 항공, 전기차 배터리, 은행이다. 항공업계는 항공기 비용과 연료 등을 달러화로 결제한다. 구조적으로 외화부채가 외화자산보다 많다. 대한항공의 순달러부채는 지난해 9월 말 33억 달러로 환율이 10% 오르면 약 330억 원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한다. 아시아나항공(2024년 9월 말)은 달러 자산은 8001억 원이지만 달러부채는 이보다 4배 이상 많은 3조 6278억 원에 달한다. 저비용항공사(LCC)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전기차 배터리 업체도 외화 빚더미 위에 앉아 있다. 전기차 판매 부진에 중국발 저가 공세에 따른 점유율 하락으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은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빚으로 부족한 돈을 메우고 있는 셈인데 외화가 많다. 특히 배터리업체는 모두 미국 공장을 건설 중인데 수조 원의 투자자금을 대부분 달러로 빌리고 있다.
2024년 9월 말 기준 LG에너지솔루션은 달러자산 4조 4397억 원, 달러부채 6조 8284억 원이다. 환율이 10% 상승하면 연간 2389억 원의 손실이 날 것으로 공시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 8009억 원 가운데 약 3분의 1이 환손실로 날아가는 셈이다. 삼성SDI는 외화환산 부채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외화환산이익보다 외화환산손실이 많아 역시 비슷한 상황으로 추정된다. SK온은 2023년 말 2조 5695억 원이었던 달러부채가 2024년 9월 말 3조 4379억 원으로 34% 증가했다.
반면 은행은 외화부채도 많지만 외화자산 역시 많아 실제 부담은 그리 크지 않다는 평가다. 지난해 9월 말 시중은행의 외화자산은 286조 5000억 원, 외화부채는 295조 원 수준으로 비슷하다. 은행들은 보통 금리 수준이 높을수록 예대마진 폭도 키운다. 대출 부실만 크게 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자 이익을 더 늘릴 기회인 셈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