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기업 투자자는 회사가 규모나 수익성, 잠재력 등에 기초해 시장에서 적정하게 평가받기를 원한다. 보다 솔직히는 동종업계 주가수익비율에 부합하거나 적어도 장부상 가치보다는 높게 평가되기를 바랄 테다. 금융당국도 투자자 요구에 부응하면서 더불어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밸류업을 위해 기업이 적극적인 활동을 하거나 금융당국 차원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펴는 것이 당연히 나쁠 리 없다. 그러나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일을 방치하거나 눈감아준다면 적극적으로 밸류업을 추진한다고 해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자칫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국내 주요 상장기업에서 사업 자체의 수익성이나 전망과 상관없이 기업가치를 갉아먹는 핵심 요인은 지배주주의 부당한 사익 추구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후진적 지배구조에 있다. 지배주주라고 하지만, 소유지분이 지배력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밸류업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국내 대기업집단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만큼, 특정 기업집단만 콕 집어서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껏 국내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를 가장 크게 하락시킨 사건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구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하 ‘삼성물산 합병’)을 비롯한 삼성그룹 지배권 승계작업이다. 사업적 필요성보다는 지배주주 이해관계에 따라 합병을 추진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달가운 평가를 받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삼성물산 합병은 합병비율마저 불공정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아직 확정 전이지만 실제로 엘리엇 매니지먼트, 메이슨 캐피탈 등은 국제중재판정을 통해 불공정한 합병비율로 입은 손해를 인정받았다. 외압으로 합병에 찬성했던 국민연금도 뒤늦게나마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한 상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형사처벌, 이재용 회장에 대한 뇌물, 횡령 등에 대한 형사처벌로 이 사건에 대한 사법적 조치는 모두 이루어졌다는 인식도 많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서 대법원은 승계작업과 뇌물죄는 인정하면서도, 삼성물산 합병과 같은 개별 사건의 승계작업 해당성이나 뇌물 관련성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법률전문가가 보기에는 사안의 쟁점이나 판단 범위가 다르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지난해 2월 이재용 회장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던 삼성물산 합병 사건을 포함해 지금까지의 사법적 판단을 모두 종합하면 △부당하고 위법한 승계작업이 있었고 △뇌물수수 및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대한 부당한 외압이 있었지만 △삼성물산 합병은 승계작업 목적이 아니었고, 합병비율도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했다고 할 만큼 부당하지 않았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주식시장과 투자업계에서는 합병이 추진될 때부터 이미 핵심 목적이 지배권 승계임이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삼성물산 합병은 승계작업의 핵심이자 현재까지의 최종 이벤트였다. 한편 합병비율에 문제가 없다면 국민연금에 대한 부당한 외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정부가 엘리엇이나 메이슨에게 막대한 손해배상을 할 이유도 없다.
지금까지 내려진 사법적 평가는 일반 상식이나 보편적인 정의관념으로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자본시장 건전성과 국민 노후와 직결된 국민연금, 나아가 민주주의에까지 큰 위협이 있었음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핵심 사건인 삼성물산 합병과 최대 수혜자인 이재용 회장에 대해서는 응분의 법률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국내외 투자자의 눈에 한국은 여전히 정경유착 위험을 배제할 수 없고, 주주가 부당한 손해를 입더라도 사후적인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든 시장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1심에 대한 항소심이 오는 2월 3일 판결 선고를 앞두고 있다. 삼성물산 합병에 관한 사법적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 회복과 기업지배구조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해 8월 삼성물산 합병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가 일부 인정된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이 국내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와 건전성을 회복하고, ‘밸류업’으로 가는 유의미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노종화는 회계사이자 변호사다. 현재(2017년 5월~)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상근)으로도 재직 중이다.
노종화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