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은 지난 2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강빌딩에 있는 김대중재단 사무실에서 문희상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90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문 전 의장은 시대정신을 22번 언급했다. 그가 강조한 시대정신은 ‘통합’이다. 탄핵 정국을 마무리하면 적절한 시기에 개헌도 논의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그러면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여야 대선 후보들이 임기 단축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하며 아마 그럴 것”이라고 내다봤다.
군부독재 정권 퇴출 이후 첫 번째 비상계엄과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구속. 혼란스러운 정국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우리가 지나온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음은 문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이번 계엄은 ‘느닷없이 망상에서 출발한 민주주의 말살’이다. 나 역시 뉴스를 통해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이 이상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 국회가 침탈당하고 국회 문이 봉쇄되고 국회 안으로 군인과 헬기가 들어왔다. 민주주의의 공리가 무너지는 걸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다. 윤석열 정부는 비상계엄으로 자멸했고 자폭했다. 이후 벌어지고 있는 정치 주체들의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여당은 계엄과 내란을 옹호하고 탄핵 반대를 선동하고 있다. 극우세력이 준동하고 날뛰면서 민주주의 말살로 가고 있다.”
―훗날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 거라고 보나.
“12월 3일 이전과 이후로 대한민국 현대사가 갈릴 정도라고 본다. 한국 정치 현대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될 날이다. 계엄 이전까진 개헌이나 선거법 등 제도적으로 정치 복원하는 방안들을 제안했는데, 이제는 전부 소용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민주주의 복원이 최우선이다. 정치 부활이나 복원은 제안할 의미가 없다. 계엄 사태부터 깨끗하게 마무리할 시기다.”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패착은.
“윤 대통령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통합에도 실패했다. 집권 내내 국회를 무시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 결과 협치가 붕괴됐다. 민주주의 기본은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한 협치다. 특히 여소야대에서 더욱 중요하다. 가장 앞서야 할 사람이 대통령이고 그 최종 책임도 대통령과 여당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명패를 앞에 놓고 행동은 정반대로 했다. 집권 내내 전 정권 탓, 국회 탓, 언론 탓, 모든 걸 남에 탓하더니 탄핵 심판 중엔 헌재에서 부하 탓까지 하고 있지 않나. 대통령 평가는 덧셈이 아닌 곱셈이다. 경제나 안보 등 다른 문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어도 국민통합에 믿음을 못 줬다면 모두 0점인 셈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다. 그런데 이 정권은 남북 관계도 최악, 경제도 최악인데 계엄까지 선포했다. 곱할 것이 없다.”
―민주주의 후퇴라고 하는데, 민주주의 요체는 무엇인가.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 민주주의 두 기둥이다. 국회는 삼권분립 중심축이고 법치주의 뿌리와도 같다. 국회에서 만든 법은 대통령도 국민도 모두 지켜야 한다. 대통령부터 국회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은 그러지 못 했다. 민주주의 요체를 무시하니 퇴보하는 것이다. 무너진 정치를 복원하는 첫 길은 민주주의 회복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대통령이 힘을 못 썼다는 주장도 있다. 여소야대 국회에선 언제나 탄핵이 거론됐다는 말도 나오는데.
“노태우·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했지만, 대통령은 빛났다. 이 세 대통령을 샘플로 삼아야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의회주의자다. ‘1노(노태우)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체제’에서 야당 총재 3명과 합의해 제5공화국 청산 청문회를 했다. 여야가 합의한 법안 통과율도 75.4%로 기록적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협치가 무엇인지 인사로 보여줬다. 보수정당의 김종필·이한동·박태준 총리에 앉히고 경제 분야 내각도 나눴다. 보수 핵심 인사인 이종찬을 국정원장으로 임명했고, 김중권을 비서실장에 발탁했다. 현대판 탕평책을 쓴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떤가.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을 각오하면서까지 국회에서 의결한 대북 송금 특검을 거부권 행사하지 않고 받았다. 엄청난 일인데도 국회 결정을 존중했고 따랐다. 이게 정치다.”

“탄핵 국면부터 마무리하고,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계엄이 아니라 개헌을 해야 했다. 아마 12월 3일 이전에 개헌을 꺼냈으면 가능했을 것이다. 본인이 탄핵에 몰려 궁여지책으로 내놓을 것이 아니라, 본인 임기 단축을 내걸고 개헌을 했어야 된다는 말이다. 국회가 수시로 탄핵을 쉽게 꺼내 드는 상황은 정상 아니지만, 이번 내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탄핵 아니면 답이 없다. 다만 조기 대선에 들어서면 모든 후보가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겠느냐는 희망이 있다. 임기 3년만 집권하고 내려오는 것이다. 국민들도 헌법 개정을 강하게 원해야 한다. 제도는 결국 국민들 힘으로 고치는 것이다.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가 국민 관심을 끌면 다른 후보들도 앞다투어 나설 것이다. 그 여론을 만드는 언론 역할도 중요하다.”
문 전 의장은 시종일관 시대정신과 통합을 강조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시대정신은 총 22번, 통합은 37번을 언급했다. 어떤 지도자를 골라야 하냐는 질문에도 “시대정신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기 대선이 시행될 경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이 될까.
“단연 통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랜 정치 경력으로 대권주자가 된 건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만년 꼴찌였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노풍이 불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난 것이다. 지도자 덕목에 딱 맞는 사람이 시대정신을 타고나면 그 사람의 정치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한 상황이다.
“부진즉퇴(不進則退)라고 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게 된다. ‘세상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 안 나오는 사회는 시대정신이 없는 죽은 사회다. 어느 사회든 30%는 개혁을 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반대로 기존 가치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세력도 30% 있어야 한다. 나머지 40%는 중립이 아닌 중도 세력이다. 균형 감각을 가지고 때로는 진보를, 때로는 보수 세력의 말을 들어주는 게 중도다. 이렇게 수평적 정권 교체가 되는 체제를 갖춰야 민주주의가 바로 선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극우 세력들이 치고 들어오면서 이 신뢰가 무너졌다.”
―남북 관계를 비롯한 외교도 크게 악화했다. 당분간 풀릴 기미조차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남북 관계가 이 이상 악화할 수 없을 만큼 역대 최악이다, 묘수는 없다.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복기해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대화 정국 재개 외에는 백약이 무효하다고 본다. 외교를 나선 지도자가 제일 중요하게 할 것은 국익이다. 무엇이든 대한민국에 이득이 안 되면 다 소용이 없다. 항상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판단해야지 어떤 이념의 잣대에 따라 상대방을 적으로 모는 어리석은 방법을 써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한미 동맹이 첫 번째고 두 번째가 한미일 공조 체계다. 이건 보수든 진보든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되는 아이덴티티다. 마지막으로 중국과 러시아 관계도 잘 다져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 4대 강국은 우리가 일본에 국권을 상실할 때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거쳐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는 관계국이다. 우리 반도인의 숙명이기도 하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계파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계파 갈등 그 자체는 전혀 문제 아니다. 오히려 좋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갈등이고 그걸 인정하면서 출발한 제도다. 국회는 떠들라고 있는 거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생각과 다를 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정치 본질이다. 일극화 체제가 되는 건 불행한 일이다. 주류는 책임을 지고 비주류는 주류를 비판하며 발전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 정체성을 ‘중도보수’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보나.
“나쁘게 보지 않는다. 계파 갈등과 같은 맥락이다. 당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나오는 게 더 문제다. 당연히 반론이 나왔어야 한다. 건강한 거고 당연한 민주주의다. 지도자가 덕목이 있다면 당 내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을 균형감각 있게 통합하고 아우를 것이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나.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균형감각과 통합이다. 리더십은 정치가와 정치꾼을 가른다. 제대로 된 지도자는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등 시린 사람은 따뜻하게,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그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이게 정치의 본령이고 리더십이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정치가가, 다음 선거만 생각하면 정치꾼이 뽑힐 것이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모두 가지고 당장의 현실 문제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정치 본령은 무엇인가.
“무신불립(無信不立).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란 병(兵), 식(食), 신(信)이라 했다. 각각 안보, 경제, 신의를 뜻한다. 이 셋 중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안보, 그다음은 경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국가는 공동체의 구성으로 생긴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기본이 서로 간의 신뢰다. 믿음 없는 정치는 모래성이나 물거품 같은 것이다. 신뢰가 없으면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끝으로 탄핵 정국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국민에게 해줄 말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국민들이 그 난관을 해결했다. 때마다 거리로 나섰고 혁명을 외쳤고 제6공화국까지 만들어 냈다. 이번 계엄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이 곧장 국회로 달려갔기에 막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러지 않겠나. 난 우리 국민들을 믿는다.”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문 전 의장에게 그동안 정치를 하면서 가장 기뻤을 때와 가장 슬펐을 때를 꼽아 달라 주문했다. 이에 대해 문 전 의장은 가장 기뻤을 때를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순간이라고 했다. 가장 슬펐을 때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를 회고하는 문 전 의장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눈가엔 옅은 물기가 어렸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