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스캔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져선 안 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일 것이다. 마릴린 먼로를 비롯해 수십 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던 그는 ‘바람둥이 대통령’이었지만, 대중은 그의 젊고 단호하며 진보적인 모습을 사랑했다. 그를 사랑한 건 언론도 마찬가지였고, 대통령이 저지르고 다니는 경솔한 사건들을 자신들만 알고 덮어두었다. 1963년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에도 언론의 비호는 계속되었고, 그들은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영광을 잇기를 바랐지만 그도 1968년에 암살되었다. 그도 만만치 않은 풍운아였고 몇몇 여배우를 형과 ‘공유’했던 사이였지만, 이 모든 사실은 절대 언론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하지만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케네디 가문의 막내이자 당시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흔히 테드 케네디로 불리던) 때문이었다. 그가 1969년에 일으킨 채퍼퀴딕 스캔들은 긴 세월 동안 감춰진 케네디 가문의 방대한 스캔들의 봉인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은 너무 치명적이었고 임계점을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흔히 케네디의 여성 편력이 그가 죽은 후에 곧장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생각하지만 채퍼퀴딕의 그 사건 이전엔 루머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미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고 힘 있던 가문의 감춰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폭로의 계기가 된 채퍼퀴딕 스캔들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4남 5녀를 두었다. 사업가이자 정치가였던 조셉 케네디는 한때 대통령을 꿈꾸었지만 이루진 못했고, 아들들에게 자신이 야망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장남인 조셉 케네디 주니어는 2차 대전 때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인 존 F.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저격당해 세상을 떠났으며, 셋째 아들이자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명의 형이 모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케네디 가문의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아직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던 그의 삶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무분별한 사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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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케네디와 그의 차에 동승했다 사망한 코페크니(왼쪽)와 오른쪽 사진은 사고현장. |
조짐은 1969년 봄부터 뚜렷하게 드러났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만취 상태로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형 로버트가 애용하던 은색 술병을 들고 계속 술을 마셨으며 스튜어디스에게 물건을 던지고 난동을 피웠다. 하지만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에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민주당의 강력한 대선 후보였던 에드워드 케네디는 1969년 7월 18일 자신이 상원의원으로 있는 매사추세츠의 작은 섬 채퍼퀴딕에서 선거 운동 파티를 열었다. 그는 오후 11시 15분에 장소를 떠났는데 이때 파티에 있었던 한 여성이 자신을 호텔로 데려다 달라며 동행을 요구했다. 그 여성은 메리 조 코페크니. 형인 로버트 케네디의 비서였다.에드워드 케네디는 기사에게 “계속 파티를 즐기라”고 한 뒤 코페크니를 옆에 태우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코페크니는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지갑과 호텔 키를 파티 장소에 남겨두고 떠났다. 하지만 자동차는 다리에서 떨어져 바다로 추락했다. 사실 에드워드는 항상 난폭한 운전자였다. 대학 시절부터 과속과 신호 위반 등으로 숱한 위반을 저질렀고, 이후 상원의원이 되었을 때도 시속 150킬로미터 이상을 밟으라고 항상 다그치곤 했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운전자였던 에드워드는 물에서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지만, 코페크니는 세상을 떠났다.
케네디는 이후 조사에서 그는 수차례 물에 뛰어들어 코페크니를 구하려 했으나 지쳐서 구조할 수 없었으며, 동네 민가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가 하루가 지나도록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호텔 방에서 17통의 전화를 했지만 경찰에 건 건 없었다. 어부들의 그물에 전복된 자동차가 걸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아침에 말쑥한 차림으로 호텔 앞에 있는 케네디를 발견하기도 했으며, 조사 결과 그는 사건 이후 심지어 파티 장소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코페크니의 입과 코와 치마에서 혈흔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어물쩍 넘어갔고, 검시 없이 장례식이 치러졌다. 유족들은 케네디에게서 9만 달러, 보험회사로부터 5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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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가의 형제들. 왼쪽부터 로버트, 에드워드, 존 케네디. |
채퍼퀴딕 사건에서 에드워드 케네디의 행동은 무책임의 극치였고, 결국 사고 현장 이탈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정치 생명이었다. 이때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은 테오도르 소렌슨이었다. 그는 존 F. 케네디가 취임 연설 때 했던 명언인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라는 구절을 썼던 사람이었다. 소렌슨은 케네디가 그날 밤에 겪었던 일을 마치 무용담처럼 만들었고, 케네디는 TV를 통해 기자회견을 하면서 ‘칠흑같이 어두운 물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항간에 떠도는 ‘음주운전설’과 ‘내연녀설’ 등을 부인했다. TV 시청자들은 겸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케네디를 더 이상 헐뜯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지미 카터에게 대선 후보 자리를 물려줘야 했지만, 이후 그는 꾸준히 정치인으로 살 수 있었다.하지만 그의 진짜 비극은 사건으로 겪은 구설수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아내인 조앤 케네디를 잃었다. 1958년 22세의 나이에 케네디 가문의 며느리가 된 조앤은 채퍼퀴딕 스캔들 내내 남편 곁을 지켰고 희생자인 코페크니의 장례식에 함께 참석했으며, 케네디에게 선고가 내려질 때도 법정에 함께 있었던 충실한 반려자였다. 하지만 며칠 뒤 그녀는 아이를 유산했으며, 이후 힘든 결혼 생활을 유지하다가 1978년에 별거를 시작했다. 이 시기 그녀는 어느새 알코올중독 상태가 되었으며 1982년에 이혼한 뒤에도 계속 술에 의지해 살았고 암으로 고생했다. 이 모든 것이 채퍼퀴딕 스캔들 때문이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영향을 주었다는 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