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쇼트트랙 월드컵 대회 마지막 날 1000m 경기를 마친 후 만난 안현수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
―어제, 오늘 경기장에서 ‘기자’가 아닌 ‘팬’으로 응원을 했다. 5년 전 부상당한 이후 이렇게 스케이트를 잘 타는 안현수 선수를 본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더욱이 1500m에서 5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해 기쁨이 더 크겠다.
▲지난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계주에만 출전했는데 이렇게 개인전 출전은 5년 만에 처음이다. 5년이란 공백은 선수한테 극복하기 힘든 긴 시간이다. 그냥 은퇴하다가 복귀한 것도 아니고 4차례의 수술까지 받은 무릎 부상을 딛고 재기한 것이다. 그동안 선수들도 많이 변했고, 쇼트트랙의 흐름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한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첫 출전부터 금메달을 획득하는 바람에 자신감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안현수는 월드컵 1차대회에서 1000m 금메달, 3차대회 1000m 금메달, 그리고 중국 상해에서 열린 4차대회에서 1000m 은메달, 1500m 금메달을 획득했다)
▲ 왼쪽부터 4차대회 1500m에서 2위 노진규(사진 왼쪽)를 제치고 5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4차대회를 마치고 공항 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 안현수와 동료들(가운데). 안현수 팬카페 회원들이 상해까지 찾아와 열띤 응원을 펼쳤다. |
―3차대회 1000m에선 곽윤기와 충돌 논란이 일어났고, 4차대회 1500m에선 신다운이 1위로 골인한 후 실격패를 당하는 바람에 2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 금메달을 딸 때마다 공교롭게도 한국 선수들과 관련된 내용이 더 부각됐었다.
▲노진규와 곽윤기는 세계적인 선수들이다. 내가 없었을 때는 그들이 세계 최강이었다. 그런 점에서 난 부담없이 대회에 나섰고, 그들은 조금 부담을 갖고 출전했을지 모른다. 3차대회 1000m 때는 (곽)윤기랑 두 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처음 출발할 때랑 마지막 바퀴에서 부딪혔다. 이전에는 그렇게 부딪히면 체력이 떨어져서 힘들게 탔을 텐데 꾸준히 훈련한 덕분인지 1위로 골인을 했다. 윤기와의 충돌은 마지막 바퀴보다 출발할 때의 충돌이 조금 걱정됐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지만 심판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실격 여부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둘 다 고의가 아니라고 판정했고 내 금메달을 인정해줬다. 4차대회 1500m에서는 나와 상관없이 뒤에서 벌어진 일들이라 난 2위로 골인 후에도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은메달 획득에 만족하는 의미에서 황익환 코치와 하이파이브까지 했다. 그런데 1등으로 들어온 신다운이 계속 전광판을 쳐다보며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더라. 순간 레이스 도중 무슨 일이 있었구나 싶었는데 2바퀴 남겨 놓고 러시아의 루슬란 자카로프를 밀치는 장면이 잡히면서 실격당하고 말았다. 결국 내가 금메달을 받게 됐는데 만약 심판의 판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한국팀에서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 안현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자 응원석에 있던 부친 안기원 씨와 모친 전미정 씨 등 가족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처음 러시아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국제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을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시합에서 후배들이 메달을 따면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수고했다며 격려도 했다. 예전이랑 똑같다. 내가 다른 팀에 속해 있다는 것 외엔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그 사이의 말할 수 없는 감정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느새 한국대표팀에도 세대교체가 이뤄져 노진규 등은 나랑 같이 국제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는 후배였다. 외국 선수들을 만난 지는 5년 만이다. 부상으로 볼 기회가 없었다. 후배들보다 외국 선수들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아직도 선수 생활하느냐면서(웃음). 내가 월드컵 1차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가장 먼저 축하해준 사람들이 외국팀 선수들이었다. 이렇게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한테 인정을 받는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2011년 6월 러시아로 건너간 이후 국제대회에 출전하기까지 굉장히 힘든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러시아 선수들은 나한테 뭔가를 배우려고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선수들도 쫓아가지 못하는 날 보고 얼마나 황당했겠나. 선수들 표정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좋아해줬다. 무엇보다 내가 일어나면서 러시아대표팀 선수들 수준이 향상됐고, 내 기술, 노하우 등이 전달되면서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바로 대표팀이 계주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부분이나 1500m 결승에 3명의 러시아 선수들이 진출한 일들이다. 이 부분은 정말 보람되고 감격스러울 정도다.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이 안현수 선수를 크게 신뢰한다고 들었다.
▲내가 여기에 올 때만 해도 난 이미 재기 불능의 선수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선수를 데려다 놓고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다. 개인 코치도 붙여주셨고 담당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전문 의료진을 스태프로 꾸려주셨다. 연맹 회장님은 지금의 날 보신 게 아니라 2014소치올림픽에 설 ‘빅토르 안’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내 존재가 러시아팀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확신하셨고, 지금 조금씩 그 확신에 대한 답을 찾고 계신 것 같다. 나한테는 연맹 회장님이 은인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마냥 안현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지난 날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풀어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소치올림픽에서 토리노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했다. 개인전보다 단체전인 계주에서 러시아대표팀을 이끌고 메달을 획득하는 부분이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얘기로 앞에 앉은 기자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쇼트트랙을 시작하면서부터 전 운동이 즐겁지 않았어요. 경기장 나가면 갖은 파벌과 이해관계로 인한 싸움들이 제 가슴을 옥죄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선 훈련시간이 즐겁고 기다려져요. 선수들, 코치님들을 만나 웃고 떠들고 장난치면서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으니까요. 소치올림픽은 저한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어요. 무엇보다 한국 빙상계에 ‘안현수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중국 상해=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그에겐 훈련보다 힐링이 필요했다”
▲ 황익환 코치. |
“훈련량을 적게 가지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넌 이미 많은 걸 해봤고 해왔던 길을 다시 가기 때문에 그 길을 처음 가는 선수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황 코치는 처음 러시아대표 선발전 때 안현수의 성적은 꼴찌였다고 한다. 선수한테 충격적인 결과였지만 절대 실망하지 말자고 다독였다고.
“대화를 나누면서 현수한테 상처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러시아 귀화 후 러시아대표팀을 이끌던 당시 한국인 감독, 코치들과 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같은 한국인들이고 빙상계 사제지간이라 러시아대표팀에 한국인 지도자가 있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현수는 여기 와서도 한국인 지도자들한테 ‘왕따’를 당한 것이다. 러시아 연맹에서 그들을 퇴출시키면서 현수가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지만 6개월가량 받은 상처가 꽤 깊고 컸었다.”
황 코치는 안현수가 대회를 거듭할수록 이전의 경기 감각을 빠르게 되찾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안현수는 안현수더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줄 몰랐다. 자신도 체력이 붙으면서 조금씩 스피드에 욕심을 내고 경기도 적극적으로 풀어나간다. 앞으로 5개 정도의 대회가 더 남았는데 잘 마무리해서 다음 시즌에는 완벽한 몸 상태를 선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