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은 이런 과거 사례를 소환하면서 전의를 불태우는 모습이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분열했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 거론된다. 국민의힘 내부에서 “끝까지 가보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뒤집기엔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역대 대선 민심은 일찌감치 승자를 결정짓지 않았다. 끝까지 변동성을 잃지도 않았다. 많은 당선자들이 챔피언이 아닌, 도전자의 입장에서 결승선까지 달려갔다. 이들은 승부를 뒤엎고 선두를 꺾으며 대권을 손에 넣었다. 특히 대선 투표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뤄진 ‘후보 단일화’는 역전극의 기폭제가 됐다.
1997년 15대 대선 때 청와대와 각을 세우며 차별화에 성공한 여당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대세론을 형성하며 정권교체 여론을 잠재우고 있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이회창 후보에게 도전장을 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DJ)는 2위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좀처럼 지지율을 올리지 못했다.
대선 전초전 성격이었던 1996년 4월 11일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고작 79석 획득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DJ 대권 가도에는 온통 적신호뿐이었다. 그러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 이인제 후보의 당내 경선 불복과 탈당 등 여권에서 잇따라 악재가 터졌다. 마침내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DJ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JP)와 이른바 ‘DJP 연대’를 성사시켰다. 공동정권 구성과 내각제 개헌 등을 고리로 해서였다. DJP 연대는 충청표를 가져오고 영남으로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는 효과를 보여줬다. 결국 DJ는 이회창 후보를 1.53%포인트(p) 초박빙 격차로 제쳤다. 대선 막판 신한국당 강삼재 의원 폭로로 ‘김대중 비자금 사건’이 터졌지만 이 후보는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
제16대 대선 역시 롤러코스터 판세였다. 16대 대선 주인공이 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한나라당에서는 위협적인 대항마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후보가 젊은 층 호응을 받고 있다는 점과 영남 지지표를 잠식할 가능성을 눈여겨보기는 했으나 전국적 지지도가 낮아 대선후보가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정치권 예측을 돌려세우면서 노무현 후보는 민주당 국민경선제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며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키웠다. 그렇지만 대선 재수에 나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이번엔 ‘이회창 대세론’이 결실을 맺을 것처럼 보였다.
노무현 후보는 승부수를 던졌다. 2002년 11월 16일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방식에 전격 합의했다. 여론조사를 거쳐 같은 달 25일 새벽 노 후보가 단일후보로 확정됐다. 대선 지형은 이회창-노무현 양강 구도로 급속 재편됐다. 대선일 전날 밤 노 후보와 손을 잡았던 정 후보가 돌연 지지철회 선언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노 후보 지지층 결집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이끌었다.
제17대 대선에서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 이명박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역전극을 썼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박근혜 의원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경제를 앞세워 박 의원을 눌렀다. 그리고는 노무현 대통령과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선 후보 사이가 벌어지는 여권 분열 효과까지 누리며 본선에서 정동영 후보를 대선 역사상 최대 표 차이로 제쳤다.
제18대 대선의 경우, 선거 1년 반 전 시점부터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선두를 달리며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 판세가 끝까지 갔다. 대선 투표일을 불과 26일 앞두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가 이뤄졌지만 이를 뒤집진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도 문재인 대세론이 유지되면서 이변이 나타나지 않았고 문재인 후보가 예상대로 청와대로 갔다.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새누리당 간판을 내리고 자유한국당으로 새출발한 당시 여당은 처절한 변신 노력에도 불구, 지리멸렬했다. ‘박근혜’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자유한국당은 휘청거렸다. 자유한국당은 존폐 위기에까지 몰렸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의원들이 새살림을 차리겠다면서 당을 떠났고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명색이 여당이었지만 자유한국당은 대선에 내세울 만한 간판스타를 찾아놓지 못했다. 대선 후보 구인난에 시달리면서 수백억 원에 달하는 대통령 선거 비용 100%는커녕 50% 보전도 못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2017년 2월 중순 ‘성완종 리스트’ 2심 재판 무죄 선고와 뒤이은 당 징계 해제로 대선 출마 족쇄에서 풀려난 홍준표 경남지사가 당의 구원투수로 호명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파면 직후인 2017년 3월 31일 대선후보로 선출된 홍준표 후보는 보수 지지층 사수 총력전에 들어갔다. 중도로 손을 뻗는 대신, 강경 보수층만이라도 확실히 결집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는 “종북 좌파를 때려잡고 강성귀족노조를 손보고 전교조를 용서하지 않겠다”면서 선명한 보수색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여론조사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서 정체됐던 홍 후보는 잠복했던 보수층 지지를 조금씩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강한 미국’을 표방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들어섰던 첫해였기에 대선(5월 9일) 한 달여를 앞둔 그해 4월엔 한반도 위기 상황이 초래됐다. 이는 ‘튼튼한 안보’를 내세운 홍 후보의 지지율 상승을 견인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열돼 홍준표, 유승민이라는 각각의 대선 후보를 낸 보수가 대선판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초반 대세론을 등에 업고 독주했고 보수의 분열에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까지 대선에 참여하는 다자 구도 속에 41%라는 저조한 득표율에도 불구, 승리를 거머쥐었다. 홍준표(24.03%) 안철수(21.41%) 유승민 후보(6.7%)가 연대했다면 승부는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2017년 자유한국당 대선 캠프에 있었던 한 전직 의원은 “당시 대선 투표일 직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후보는 40% 정도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후보도 대선 득표율과 비슷한 수치를 보였지만 홍준표 후보만 10%대에 머문다는 조사가 많았다”며 “그런데 실제 대선 득표 결과는 홍 후보가 여론조사 때보다 10%p 이상 더 나왔는데 샤이 보수가 많은 것을 감안할 때 이번 대선도 막판 보수 표 결집이 이뤄지면 국민의힘이 불리한 싸움은 절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가 맞붙었던 2022년 대선만 하더라도 ‘대장동 사건’ 등 이재명 후보에 대한 검증 공세가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현미경은커녕 돋보기를 들이댈 시간도 없다는 게 정치권의 한목소리다. 일방적인 목소리만 나올 뿐 심층 검증의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의미다.
4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나갔다가 고배를 마신 한 후보는 “당내 경선부터 시간이 절대 부족하고 후보를 알릴 시간이 너무 없었다”며 “당내 예선도 그러한데 본선은 사정이 더 열악하다. 이재명 대세론을 뒤집을 만한 기회를 만들려면 물리적 시간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구조적으로 너무 불리하다”고 했다.
시간이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국민의힘은 대선 민심의 변동성을 감안할 때 ‘막판 변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우선 민주당 일부 인사들까지 아우르는 ‘반명’ 슈퍼 빅텐트가 거론된다. 여기에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 결과까지 대선 전에 도출된다면 큰 출렁거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나이가 많은 유권자들까지 휴대전화를 통해 매일 실시간으로 뉴스를 소비하고 분석과 해설까지 받아가는 시대여서 요즘 선거는 이슈 전파력이 매우 빠르다”며 “시간이 많지 않지만 국민의힘 스스로 단합과 협력을 통해 파괴력이 큰 소재를 만들어내고 대법원에서 들려올 뉴스까지 나온다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태생적 약점이 적잖은 것을 감안할 때 남은 기간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부족한 시간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강조했다.
여권에선 시간 부족이 오히려 득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오긴 한다. 김문수·한동훈 후보, 한덕수 권한대행 등은 이번이 대선 첫 출마다. 특히 보수진영 후보 중 지지율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한덕수 대행은 출마할 경우 선거 자체를 처음 치르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권의 혹독한 검증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정치권엔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했던 정치인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검증 칼날과 네거티브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시간상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이재명 후보는 사실 리스크가 공개돼 있는 상태다. 하지만 여권 후보들은 그렇지 않다”면서 “시간 부족이 여권 후보에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 mast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