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를 보면 숨 막히던 유신시절이 떠올랐다. 평범한 나 같은 학생에게도 정보과 형사는 전화를 걸어 동태를 확인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우상처럼 나오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왕이자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절대자였다. 그리고 그 가족은 내게 왕자와 공주같이 여겨졌고 너무 먼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장교 훈련시절 다음 훈련에는 왕자님이 오신다고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영부인의 죽음을 보고 청와대까지 찾아가 국모가 돌아가셨다고 우는 엄마를 보고 화를 냈다. 민주공화국은 책 속에만 있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일찌감치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선거 이틀 전 갑자기 마음이 흔들렸다. 언론인 출신이면서 청와대와 안기부 특보 등 다양한 경력을 거친 선배와 여러 얘기를 나눴다. 그는 막말로 재벌 돈을 안 먹을 수 있는 대통령이라야 진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재벌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했다. 노련한 그들은 뒤에서 웃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들의 부조리를 타도하겠다고 나선 노무현 대통령도 결국 죽은 것은 그들의 돈이 문제가 돼서가 아니겠느냐는 논리였다. 자신이 권력의 핵심에 있어봤기 때문에 껍데기와 본질의 차이를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재벌은 실질적으로 치외법권이고 정말 무서운 존재라고 했다. 겉으로는 권력에 머리를 숙이지만 뒤로는 비웃는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아무리 경제민주화를 부르짖어도 그들은 문재인 정도는 우습게 본다고 했다. 자신들의 돈을 안 먹을 수 없게 만들 자신이 있어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과 박근혜 중 누가 진짜 재벌이 던지는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있는지 그게 선거의 포인트라고 했다.
그는 박근혜 후보야말로 재벌개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장담했다. 혼자 살아온 박근혜는 돈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피빨래를 빨면서 전 국민의 돈을 걷어 재벌로 만들어준 그들로부터 철저히 배신의 쓰라림도 맛보았을 것이라고 했다. 저녁이면 방으로 들어가 외부와 차단하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재벌이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이 청와대 부속실을 담당해 봐서 누구보다도 그 생리를 잘 안다고 했다. 재벌들에게 문재인 후보보다 박근혜 후보가 훨씬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 선배는 자기도 똑같은 독재에 대한 반항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민주국가를 설립한 이승만 대통령과 산업화를 성취한 박정희 대통령이 없으면 지금 우리는 없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과거의 상속자가 이제는 미래의 대표가 된 것 같다. 삼성동의 평범한 그녀의 집을 보면 이제 더 이상 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국민을 섬기는 좋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TV화면에 함께 웃음을 짓는 식상한 과거의 사람들과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혁명재판소에 가둔 반대편의 신현확 씨를 끌어내 총리로 쓰듯 과감히 상대편을 감싸 안았으면 좋겠다. 문재인, 안철수와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그게 국민대통합이 아닐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