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합니다. 제가 볼 때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까 형님은 고마 대통령 하소.”
“어? 뭐라고?”
“형님, 대통령 하소.”
이명박 정부의 서막은 15대 국회 때 한 사담(私談)에서 이렇게 싹이 트고 있었다.
<1> 유년 시절부터 정계 입문까지
이명박(李明博:1941년 12월 19일~) 대통령의 꼬리말에는 항상 ‘신화(神話)’가 붙는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던 그는 경북 포항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는데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청계천의 신화’를 이룬 뒤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 된다. 그의 5년을 대변하는 4대 강 사업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4대 강의 신화’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지금까지의 그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양대 축인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최고 자리에 우뚝 서 본 유일한 인물임엔 틀림없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 이충우 씨와 어머니 채태원 씨 사이에서 5남인 이명박은 자신이 기억하기로 네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선이 쓰시마 섬 앞바다에서 가라앉아 맨몸으로 고향 땅을 밟았다. 시장통의 가난, 그는 정말 지독한 빈곤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설 때까지도 떨어질 줄 몰랐다”고 썼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명박은 영덕, 흥해, 안강, 곡강 등 포항 근처의 장터를 돌며 아버지의 옷감 장사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무덥고 지루한 여름. 귀애 누이가 칭얼대던 막내 상필이를 등에 들쳐 업고 마당에 나가 달래던 사이 전투기가 투하한 포탄에 목숨을 잃는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정신없이 산으로 달려가 쑥을 캐어 와선 누이와 동생의 온몸에 바르면서 기도를 올린다. 너무 가난해서 약을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명박은 가난 속에서도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매일 새벽 4시에 아이들을 깨워 새벽 기도를 올렸다. 공부를 잘했던 큰 형 상은과 집안의 희망이었던 상득은 공부에 전념했지만 이명박은 부모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이웃에 경사나 불상사가 있으면 봉사를 하러 가야 했다. 그 어떤 대가도 받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가난해도 자존심은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어머니의 국화빵과 뻥튀기 장사를 도왔는데 하필 여고 앞이었다. 그는 밀짚모자를 구해와 푹 눌러 쓰고 쌀을 튀겼다. “사내 녀석이 뭐가 부끄럽다고 이 한겨울에 밀짚모자냐?”
이명박은 똑똑했다. 포항중학교에서 줄곧 2등이었고, 집안의 반대를 설득해 동지상고 야간반에 다닌다. 3년 내내 주·야간 통틀어 1등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명박이가 늘 들고 다니던 단어장이 떠오른다. 영어 단어와 숙어 사전을 가지고 다녔는데, 궂은 날 장사를 하면서도 볼 수 있도록 표지를 비닐로 두껍게 입혀 놓은 것이었다.”(동지상고 동기 김창대),
“명박이는 이른 새벽부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레에 채소를 싣고 포항의 골목골목을 배회하며 채소를 팔았다. 남다른 성실함은 한 학년 위인 우리 반에도 유명했다.”(동지상고 동창 이무진)
이명박의 부모와 누나는 둘째 형 상득의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한다. 이명박과 여동생만 포항에 남는다. 부모님이 쌀값은 보냈지만 한창 커갈 때였다. 폐 종이로 봉투를 서른 개 만들어 양식을 똑같이 넣고는 하루에 하나씩으로 때웠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고 이명박은 회고한다. 고3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으로 이명박도 서울을 찾는다. 전체 수석자에게 주는 재단 이사장 상을 친구인 김창대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하고서였다.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중고 수험서를 사 공부한 끝에 1961년 고려대 상대에 합격한다. 대학 내내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학비를 마련해 대학을 다녔다.
이명박은 허약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갖은 고생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듬해 이명박은 자원입대했는데 논산 훈련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
“너 인마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줘. 도대체 나이 스물밖에 안 된 놈이 몸을 어떻게 굴렸기에 이 모양이야?”
군의관은 이명박을 돌려보냈다. 기관지 확장증에 축농증이 겹쳐 있었다.
그 시대 수많은 대학생이 그랬듯 이명박의 대학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대학 3학년 때 상대 학생회장에 뽑혔고 4학년 때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한다(이곳에서 중앙대의 이재오와 조우하지만 깊은 관계로는 발전하지 않는다).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을 ‘거듭나게 한’ 시간으로 회고한다. 전공 서적 이외의 책들을 읽었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존에 매달려 왔던 지난 20여 년을 되돌아보고 인간과 사회를 생각했다. 당시 면회를 왔던 어머니는 이명박에게 “나는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다.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명박의 어머니는 그가 석방된 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난다.
▲ 현대건설 재직 시절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하는 모습. 정주영 회장의 대권도전을 그가 여러 차례 만류하면서 둘 사이는 멀어졌다. |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는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 96명의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1965년 6월 면접에서 정주영 사장이 이명박의 이력서를 보다 묻는다.
“건설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이명박은 “창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정 사장은 “요즘은 말만 번지르르한 건달들이 많아”라고 하지만 그를 합격시켰다.
이명박은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빠따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의 경리사원으로 가는데 당시 임금을 받지 못한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금고를 지킨다. “경리 사원 이명박이 목숨을 걸고 혼자서 금고를 지켜냈다”는 말이 본사에 퍼진다. 말단 사원의 무용담이 신화로 증폭됐고, 그는 작은 영웅이 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정 사장이 타이 현장에 자주 머물렀다. 이때 이명박은 당시 사업이 큰 수익이 나지 않는 손실 사업임을 입증했는데 그 자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다. 정주영의 “능력 우선주의”였다.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2년 만에 대리가 되고 29세에 이사가 된다. 사장에 오른 것은 불과 서른다섯의 나이로, 입사 12년 만이었다.
이명박은 1970년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윤옥 씨를 만나 결혼했다. 부인 김 씨는 “부모님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정 큰오빠가 주위의 도움 없이 혼자서 현대건설 이사까지 된 사람이라며 부모님을 적극 설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명박은 결혼식 당일에도 “토요일이라 오전 근무를 하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한다.
이명박은 이후 현대건설 입사 23년 만인 1988년 회장이 된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의 신화를 쓴 순간이었다. 당시 그는 공휴일도 없이 하루 18시간을 일했으니 남들보다 승진이 빨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1990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대건설의 1000억 원 탈세 의혹이 제기되면서 회장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
1991년 12월 31일이었다.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첫 가족여행이었다. 그리고 1992년 1월 3일 서귀포에서 돌아온 다음 날 그는 회사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이명박 회장은 그와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정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을 세 번 만류했다. 그의 정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분노에서 인 반발 심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쓴다.
“지연이나 학연 등 사적인 감정이나 관계로 사람을 써서 재벌 총수가 된 사람은 없다. 중소기업에서 대재벌이 된 경우는 예외 없이 사람을 가장 과학적으로 쓴다. 사적 감정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나 또한 정주영 회장을 위해 일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오직 일이 있어 그곳에 있었다. 기업을 떠난 사람들은 대개 그 기업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에 매달린 결과이다. 현대와 정 회장에 대한 원망이나 실망, 섭섭함이 없다.”
▲ 김영삼의 러브콜을 받아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사진제공=새누리당 |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