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원내대표에 계파 색이 옅은 박기춘 의원(가운데)이 당선된 것도 변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다. 박은숙 기자 |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지난 12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입구에 커다란 방석을 짊어진 일군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이들은 의사당 앞 대로변에 방석을 깔고 하나둘씩 자리를 잡더니 일제히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김기준 김성주 남윤인순 박혜자 박홍근 배재정 신장용 유은혜 이원욱 진선미 최민희 홍종학 의원 등 ‘민초넷(민주통합당 초선 네트워크)’ 소속 의원들이었다. 대선 패배라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1000배를 올리기 위해 모였다고 했다.
오후 3시쯤 시작된 이들의 1000배는 6시간 뒤인 오후 9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이날 이들의 1000배는 대선 패배에 좌절한 노조 관계자들의 잇단 죽음이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일부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아무 죄도 없는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겠다”는 의견이 오갔다고 한다. 이들은 이날 1000배에 들어가기에 앞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총선과 대선 두 번의 선거에서 패했다. 우리가 그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며 “더 이상 선량한 국민들의 희생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민초넷 소속 의원들은 새 원내대표 선출이 있었던 28일에도 별도 성명서를 내고 “대선 패배 이후 잇따르고 있는 노동자의 죽음과 실의에 빠진 국민의 원망 앞에서, 정권교체와 새 시대 창조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혁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촉구했다.
그동안 존재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온 초선들이 이처럼 대선 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민주당 내에서도 대선 패배의 충격을 넘어 ‘새로운 모색’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마침 28일 있었던 새 원내대표 경선에서 계파색이 옅은 박기춘 의원이 범친노(친노무현)그룹으로 분류되는 신계륜 의원을 꺾고 당선된 것도 ‘변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제 막 꿈틀거림이 시작됐을 뿐이라는 냉정한 평가가 아직은 더 우세하다. 스스로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고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네 탓 공방’ 수준에 머무르거나 대선에서 패한 뒤에도 여전히 안철수 전 후보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선 이후 민주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책임론 공방은 지켜보는 이의 짜증을 유발하고도 남는다. 대선 때 문재인 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라면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비노그룹의 김영환 의원이 지난 23일 ‘대선일기’를 통해 “친노의 잔도(棧道·오솔길)를 불태우라”고 주장한 게 시발점이었다. 김 의원은 “분열은 안 되고 싸우지 말고 단합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1400만표 이상을 얻었다고 강변하면서 적당히 평가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면서 “우리는 지난 총선 패배 후에도 너무나 똑같이 이런 태도를 보여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당이여! 이제 ‘친노의 잔도’를 버리고 새로운 길로 가야 한다. 그 출발점은 충분히 철저하게 지난 대선에 대해 평가하고 복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노 책임론’과 함께 친노그룹의 2선 후퇴를 제기한 것이다.
그러자 친노그룹 내에서 반발이 뒤따랐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전해철 의원은 26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선 패배 이유를 일부에 한정해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당 안팎에서 제기된 ‘친노 책임론’에 대해 ‘공동 책임론’으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전 의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친노가 누구냐는 것도 불분명하다” “분명히 친노라고 해도 그럼 도대체 어떤 책임이 있느냐. (친노 참모들은) 백의종군 선언 이후 선대위의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쏟아냈다.
이 같은 공방은 28일 원내대표 경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범친노그룹의 신계륜 의원은 “대선에서 패했는데 ‘주류의 눈물’과 ‘비주류의 눈물’이 어떻게 다르냐”며 “더 많은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지금은 주류-비주류 싸움을 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당을 복원할까 고민하고 토론하는 자리다. 지금은 우리가 통합해야 하는 때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그의 바로 뒷 순서에 정견발표를 한 비노그룹의 김동철 의원은 “그동안 당을 이끈 지도부, 선거국면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분들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게 ‘책임 정치’”라며 친노그룹을 겨냥했다. 김 의원은 “지려야 질 수 없는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고, 당의 변화와 쇄신은 눈감은 채 ‘이-박(이해찬-박지원) 담합’으로 당내 대선후보 경선도 민주당만의 잔치로 전락시켰다”며 “지려야 질 수 없는 대선까지 졌는데,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 분들이 대선 패배 후 10일도 안됐는데 당의 전면에 나서는 게 이해되는가. 오만의 극치다”라고 일갈했다. 신 의원의 원내대표 도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다.
한 참석자는 “안 전 후보가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이상 계속해서 ‘여의도 정치’에서 떠나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3년) 4월 재보궐선거나 10월 재보선이 안 전 후보가 정치를 재개할 모멘텀이 될 수 있는데, 대선의 영향권 아래 치러지는 4월 선거는 아무래도 여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며 안 전 후보가 10월 재보선을 정치 재개의 계기로 삼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또 다른 참석자는 “재보선은 ‘안철수의 파괴력’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작은 무대”라며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 과정을 거쳐 2014년 지방선거를 컴백의 계기로 삼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 ‘민주당과 함께하는 안철수’가 아닌 ‘독자적인 안철수’로 상정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오가는 얘기 정도가 아니다. 이른바 ‘안철수 신당론’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안 전 후보가 신당을 창당하기보다는 민주당에 들어와서 당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이 합리적이고 올바르다”(설훈 의원), “안철수 전 후보가 독자 신당을 만드는 것은 민주당의 분열을 의미한다. 이는 (야권 단일후보인 문재인 전 후보를 지지했던) 48% 국민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강기정 의원) 등의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모두 안 전 후보가 민주당의 쇄신의 길에 동참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김영환 의원은 “2007년 이후에 민주당은 (총선·대선에서) 4번 실패했는데, 당은 해체 수준까지 가야 한다”면서 “지금 안철수나 안철수 신당은 본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선 민주당 쇄신론’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양측 주장 모두 안철수 전 후보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망사항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대선 패배 후에도 민주당이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소모적인 당내 논쟁에 휩싸이면서 당내에서조차 “민주당의 유효기간이 끝난 것 같다”는 절망 섞인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20년 이상 당료 생활을 해 온 한 당직자는 “이번 대선 패배의 의미가 당내에서 제대로 공유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자괴감을 토로했다. 그의 말 속엔 민주당이 더 이상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할 능력을 상실한 것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투표를 안 한다고 욕을 먹었던 20대의 67%가 투표에 참여했고, 그렇게도 친노그룹에 불만이 많다고 했던 호남에서 90%가 문재인 전 후보를 지지해 줬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 지지층은 민주당에 할 만큼 다 해준 것이다. 그런데도 졌다. 지지층이 이만큼 몰아줬는데도 졌다면 다음에도 이긴다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뼈를 깎는 쇄신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당내에서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걸 보면 너무도 한가해 보인다. 패배가 마치 만성질환처럼 반복되면서 이제 다들 아픈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박공헌 언론인
“이미 이겼다” → 그때부터 진 것
“이번 대선은 ‘뒷심’에서 승부가 갈렸다. 선거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12월 19일 대선 당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오랜 당직자 생활을 거치며 지난 1997년 대선 등 주요 선거를 가까이서 지켜본 한 민주통합당 당직자가 대선 패인을 분석하면서 쏟아낸 말이다. 그의 진단은 민주당이 대선 막판에 고삐를 놓았고, 이 때문에 패했다는 것이었다. 이 당직자는 “대선에 임박해서, 그리고 심지어 대선 당일까지 계속 문재인 전 후보가 승리한다는 내용의 여론조사 결과들이 설처럼 떠돌았다”며 “근거는 없지만 누군가가 우리의 긴장을 풀어놓기 위해 작업을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도 말했다.
이처럼 문재인 선거캠프가 대선 선거운동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문 전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한 부대변인은 “대선 전날인 12월 18일은 당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끝까지 몰아치는 선거운동을 했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분위기가 나타났었다”며 “역대 대선 후보들과 달리 문 전 후보가 마지막 유세를 부산에서 한 탓도 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지막 날에 이미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캠프 관계자는 “대선 당일 심지어 새누리당 의원실에서도 투표를 독려하는 문자 메시지와 음성 메시지가 계속해서 배달돼 왔는데, 우리는 별로 한 게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사전 여론조사 결과들이 좋게 나왔고, 대선 당일에도 오전 일찍부터 투표율이 워낙 높게 나왔기 때문에 이에 도취돼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서울지역 한 의원은 “경기도 쪽 얘기를 들어보면 마지막 날 유세 차량이 출동하지 않은 채 방치된 선거구도 있었다고 한다”며 “문 전 후보가 수도권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 데에는 민주당의 조직력이 막판에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선거캠프 지도부가 지역구 의원들이나 지역위원장들에게 ‘관할 선거구 성적표를 다음 공천에 참고하겠다’는 식으로 다그쳤어야 했는데, 너무 방치한 측면이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