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발장이 뮤지컬 영화로 돌아왔다. 뮤지컬도 아니고, 영화도 아닐 거라는 편견을 깨고 그 영화는 <레미제라블>의 부활을 알렸다. 영화가 끝난 후 저절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보며 이래저래 인간에게 실망해서 아예 인간성을 믿지 않게 되는 일이 너무도 쉬운 이기적 세상의 뒤켠에서 별처럼 빛나는 인간성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20대의 장발장에게 가장 익숙한 정서는 체념이었다. 세상에, 열정이 얼마나 병들면 체념이 될까? 운명의 덫인 양 거부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그는 굶고 있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다. 그리고 감옥행! 강자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나 약자에겐 냉혹하기만 한 법망에 걸린 것이다. 이래저래 19년4개월을 감옥에서 썩으며 젊음을 썩히며 그는 아예 체념의 인간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된 그를 세상 속으로 초대한 인물이 바로 미리엘 신부였다.
옛날부터 나는 그 신부가 좋았다. 어떤 사치도 하지 않지만 유독 은촛대와 은식기를 쓰는 남자. 그는 은촛대에 촛불을 켜고 은식기 위에 빵을 먹는다. 그것으로 그는 귀족이 찾아오나 걸인이 찾아오나 똑같이 소박한 빵과 스프를 대접한다. 유쾌하게. 그는 밥상에서 차별하지 않은 인간 중의 인간이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를 만나 거듭난다. 그 때 나는 미리엘 신부의 인간성에 감동했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미리엘 신부를 알아본 장발장의 힘이기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장발장의 19년4개월은 젊음을 썩히기만 했던 억울한 시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 싶다.
살다보면 소화하기 벅찬 사건들이 많이도 지나간다. 대부분의 일들은 왜 겪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는지. 그저 억울하기만 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고, 하나님에 기대 하소연하고, 윤리의 이름으로 따져 봐도 안에서는 분노만 치솟고 밖으로는 더 억울할 일만 생겼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젊은 장발장처럼 절망에 빠지기도 했고 체념하기도 했다. 지나놓고 보니 그때가 그냥 겪어내야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를 쓸고 가는 사건들의 의미는 늘 생각 너머, 시비 너머에 있었다. 그러니 생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매듭이 생기고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매듭이 풀리는 것일 텐데, 그런 사건들을 쉽게 교과서에서 배운 정의의 이름으로, 논리로 해석하거나 응징하거나 대응하면 머리만 좋은 사람, 재승박덕의 사람이 되기 쉽다.
그냥 겪는 시간이 필요하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시간이. 그 시간은 행동하고 건설하는 시간이 아닌 미친 듯 떠도는, 혹은 곰처럼 호랑이처럼 동굴 속에 드는 시간이다. 그 쑥과 마늘의 시간에서 호랑이는 실패했고 곰과 장발장은 성공한 것이다. 당신의 곰은 인간이 되었는가?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