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건만 취임 7개월이 지난 현재 분위기는 적잖이 달라져 있다. 특히 트럼프가 무슨 일을 하든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MAGA 사이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를 상징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문구가 적힌 붉은색 캡모자를 불에 태우는 영상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민심이 돌아선 시작점에는 엡스타인이 있었다. 헤지펀드 매니저로 한때 사교계 마당발이었던 엡스타인은 미성년자를 성착취하고 거물급 인사들에게 소녀들을 제공한 혐의로 2019년 체포됐다. 하지만 한 달 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던 중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는 종결됐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는 계속 진행됐지만 정작 핵심 인물인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른바 은밀한 ‘비밀 고객 명단’은 사람들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던 엡스타인을 다시 불러낸 건 다름 아닌 트럼프였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는 ‘엡스타인 파일’을 재조사하는 한편, 바이든 정부가 공개하지 않았던 ‘엡스타인 고객 명단’을 낱낱이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지층을 결집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림수였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극우 성향의 유권자들은 엡스타인의 고객 명단에 막강한 권력자들, 즉 민주당 거물급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엡스타인의 미심쩍은 죽음에도 민주당 인사들이 연루돼 있다고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배후에 ‘딥스테이트(그림자 정부)’라는 비선 세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딥스테이트’란, 보이지 않는 숨은 세력이 선출직 정치인(주로 민주당)을 통제하고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이를 노린 대선 공약을 내건 트럼프는 “여러분이 나를 지지해준다면 함께 딥스테이트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 폭군들과 악당들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겠다”라고 외쳤다.
핵심 지지층인 MAGA는 열광했고, 열렬한 지지로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에 입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약속한 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트럼프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6만 3000쪽 분량의 기록을 공개했으며, MAGA와 동일선상에서 음모론을 주장해왔던 캐시 파텔과 댄 본지노를 각각 FBI 국장과 부국장에 임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트럼프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2월, 법무부와 FBI는 백악관에 보수 성향의 인플루언서들을 초대해 ‘1차 엡스타인 기밀 해제 문서’라는 341쪽 분량의 문건을 배포했다. 이는 마치 약속한 대로 엡스타인 파일의 비밀을 공개하고, 공유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빈수레가 요란했던 걸까. 엡스타인 전용기 탑승 기록,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연락처 일부 등 기존에 공개되어 있던 내용 이외에 더 이상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다소 김은 샜지만 그럼에도 지지자들은 트럼프 정부를 계속 신뢰했다. 팸 본디 법무장관이 직접 나서서 엡스타일 파일 공개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가령 2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는 “현재 엡스타인 파일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지금 검토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트럭 분량의 문서가 진실을 밝힐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5월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 FBI가 엡스타인 동영상 몇 만 개를 검토하고 있다. 엡스타인이 아이들을 이용해 촬영한 아동 성착취 영상들이다”라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
사정이 이러니 MAGA는 흥분을 넘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딥스테이트’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내고 미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은 얼마 안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지난 7월 6일, 인터넷 매체인 ‘악시오스’가 단독 입수한 법무부와 FBI가 작성한 두 쪽짜리 문서 때문이었다. 이 문서에는 “엡스타인 관련 자료를 철저히 검토한 결과, 범죄에 연루된 고객 명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엡스타인이 사망한 당일 교도소 내부 CCTV를 검토한 결과, 엡스타인은 자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시 말해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수상한 점도 없으니 더 이상 수사하지 않겠다는 결론이었다.
이에 발맞춰 지금까지 수사 의지를 내비쳤던 트럼프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이제 그만하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요컨대 얼마 전까지 “끔찍한 비밀들이 은폐되고 있다”는 주장을 퍼뜨렸던 사람들이 돌연 “비밀 따위는 없다” “자살이 맞다”며 태도를 바꿔버린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의 플랫폼 ‘트루스소셜’을 통해 “1년 전 미국은 죽어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핫’한 나라가 되었다.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제프리 엡스타인 같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라고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측근들 역시 하나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FBI 국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줄곧 엡스타인 관련 음모론을 들먹였던 파텔은 태도를 바꿔서 “음모론은 사실이 아니며, 지금까지 사실이었던 적도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지난 15년간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소설을 써왔다. 엡스타인은 누가 봐도 자살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실망한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항의와 비난이 빗발쳤다. 배신당했다며 분노를 표출한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상징하는 붉은색 모자를 불태우거나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트럼프의 열성 지지자이자 민주당 인사를 연루시킨 아동 학대 음모론인 ‘피자게이트’를 퍼뜨리며 이름을 알린 잭 포소비엑은 “우리들은 엡스타인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관심 있는 건 엡스타인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림자 체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이는 현상’이다. 그 체제는 실제로 우리 정부와 기관, 우리 삶을 통제하며,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뉴스맥스’ 진행자인 토드 스타네스는 “선거 전 몇 달 동안은 자살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자살이 맞다고 한다. 대체 법무부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며 불만을 제기했다.
1기 트럼프 행정부의 수석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 역시 “자유정보법(FOIA)에 따라 기록을 우리에게 그냥 내놓아야 한다. 어떤 기록인지 설명하고, 만약 무언가를 숨긴다면 그 이유를 알려야 한다. 이를 위한 법적 절차도 있다. 우리는 여차하면 이걸 시도할 수 있다”라며 트럼프를 압박했다. 보수 성향의 팟캐스터이자 폭스뉴스 진행자인 터커 칼슨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외교 정책은 똑같고, 경제 정책도 똑같으며, 엡스타인 영상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다”며 실망감을 내비쳤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지만 모든 것을 공개해서 국민들이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화당 전략가인 매튜 바틀렛은 “트럼프 정부는 외부에서 이 내러티브를 계속 퍼뜨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권력을 잡고 나서는 괴물을 키웠고, 그 괴물이 지금 행정부의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고 일갈했다.
이런 불만은 지지율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7월 28일, 여론조사기관 ‘SSRS 오피니언 패널’이 미 전역의 성인 10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단 18%만이 트럼프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58%는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24%는 의견이 없다고 답했다. 공화당 내부에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렸다. 38%는 긍정적, 24%는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스스로를 ‘MAGA 공화당원’이라 밝힌 응답자들 가운데 트럼프의 대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 40%에 조금 못 미쳤으며,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17%였다.

그럼 트럼프는 왜 기존의 약속을 깬 걸까. 당선을 바라고 펼쳤던 쇼에 불과했던 걸까. 트럼프의 급변한 태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혹시 수사 기록에서 트럼프에게 불리한 무언가가 나왔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예컨대 한때 엡스타인과 친분이 있었던 트럼프의 이름이 고객 명단에 적혀있었기 때문에 태도를 바꾼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그리고 이런 의심에 부채질을 하는 보도가 7월 17일 ‘월스트리저널’을 통해 나왔다. 2003년, 엡스타인의 50세 생일을 기념해 트럼프가 음란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트럼프는 굵은 마커로 그린 벌거벗은 여성의 윤곽 그림과 함께 타자기로 문장을 적어 보냈다. 여성의 가슴은 곡선으로 그렸으며, ‘도널드’라는 사인은 여성의 음모 위치에 오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일 축하한다. 매일매일이 또 다른 멋진 비밀이 되기를”이라는 글도 적혀 있었다.
이에 혹시 트럼프가 엡스타인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하지만 트럼프는 해당 편지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면서 ‘월스트리트저널’ 발행자와 해당 기자 두 명, 그리고 사주인 루퍼트 머독을 상대로 100억 달러(약 14조 원)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난 평생 그림 같은 건 그려본 적이 없다. 여자 그림은 더욱 그렇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 달리 트럼프가 그린 그림은 여러 차례 공개된 바 있다. 2005년 무렵 그렸다고 알려진 맨해튼 스카이라인 스케치는 경매에서 2만 9000달러(약 4000만 원)가 넘는 가격에 낙찰됐으며, 1990년대 그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스케치 역시 경매에 출품된 바 있었다. 심지어 2008년에는 자서전을 통해 “매년 자선단체에 내 사인이 담긴 그림을 기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역시 딜레마에 놓여 있긴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더 많은 진실을 원하는 욕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가 더 커질 경우 자칫 MAGA 운동 자체가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또한 트럼프의 결백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만약 엡스타인 관련 문서가 정말로 트럼프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왜 바이든 정부는 그것을 공개하지 않았을까”라고 묻기도 한다.
이와 관련, BBC는 “여론은 분명히 트럼프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지만 공화당 정치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트럼프의 편에 서있다”라고 분석했다. 일례로 존슨 하원의장은 처음에는 더 많은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한발 물러섰으며, 지금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만 공개되어야 한다”는 트럼프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를 인지한 공화당과 MAGA 진영에서는 서서히 꼬리를 내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칫하다간 트럼프에게 정치적 수렁이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또한 트럼프를 지지하는 인플루언서들 역시 대놓고 트럼프를 비난할 경우 오히려 팔로어들에게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대신 이 분노는 어쩌면 트럼프보다는 공화당 전체를 향할 수도 있다. 트럼프 시대 음모론을 연구한 마이크 로스차일드는 “많은 주요 인플루언서들이 격분해 있다. 이들은 트럼프에게 직접 화풀이하는 대신 공화당 전체를 향해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