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오일뱅크·현대 건설 등의 인수전에 뛰어든 정몽준 의원. 언제까지 관전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
지난 20일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부인 변중석 씨 빈소에서 대우인터내셔널 인수 의향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격이 좋으면 인수하겠지만 현재로는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느냐”고 말해 관심이 있음을 드러냈고, 현대오일뱅크 인수가 확정적이냐는 질문과 관련해서는 “모르겠다, 그게 마음대로 되느냐, 더 써 낸 사람이 있으면 어렵겠지”라고 대답했다.
허 회장의 말만 놓고 보면 현대오일뱅크보다 대우인터내셔널에 더 관심이 있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현대오일뱅크 인수전에 뛰어든 현대중공업이나 GS칼텍스, 롯데와 외국계 회사 등 네 곳의 인수후보 중 GS칼텍스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허 회장은 왜 이런 ‘아니면 말고’식의 발언을 했을까.
이는 현대오일뱅크 매각의 복잡한 속사정에서 비롯된다. 현대오일뱅크의 대주주는 아랍에미리트의 국영석유투자회사인 IPIC다. 보통주 기준으로 IPIC 쪽이 지분의 50%를 갖고 있고, 현대중공업이 33.12%, 현대자동차가 6%(우선주 포함) 정도의 주식을 갖고 있다.
현대오일뱅크의 경영권은 지난 99년 현대오일뱅크가 7000억 원대의 유상증자를 실시할 때 IPIC가 6127억 원을 투입해 보통주 주식 50%와 우선주 주식 83.33%를 확보해 현대중공업을 제치고 1대주주가 됐다.
현대 쪽에선 경영권을 내줬지만 이후의 매각에선 주식 우선매수 청구권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IPIC가 제3자에게 주식을 넘길 경우 그 주식에 대해 현대중공업 쪽에서 같은 값이라면 먼저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져 온 것.
이런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기존 정유업계에서 대놓고 달려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몸이 단 것은 IPIC 쪽. 파는 쪽 입장에선 한 푼이라도 더 받고 팔려 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IPIC는 흥행카드를 빼들었다. 이번 매각에서 보통주 기준으로 1대주주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선까지 지분을 팔아넘기겠다는 뜻을 밝힌 것.
그럼에도 현대중공업은 표정 관리에만 신경을 쓸 뿐 속내를 감추고 있다. 고작 나오는 답이 “(경쟁업체들이)하는 거 봐서”라는 정도다. ‘경영적 판단’은 입찰 제안서 마감 뒤에 인수가격을 보고 밝히겠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오일뱅크 지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처분해야 할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쪽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럼에도 업계에서는 GS칼텍스가 현대오일뱅크 인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에서는 지난 14일 관련 보고서를 내고 “GS칼텍스의 경우 후발주자인 S-오일에 한진그룹이 참여한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상황이고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면 규모가 업계 1위인 SK+SK인천정유 수준에 버금갈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유력후보로 떠오른 허창수 회장은 지난 20일 발언을 통해 현대오일뱅크보다는 대우인터내셔널에 더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김을 뺀 셈이다.
GS가 공을 들여도 현대중공업은 마음만 먹으면 GS의 인수시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GS칼텍스는 IPIC로부터 보통주 기준으로 35% 이상의 지분을 인수한다고 해도 1대주주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현대중공업의 보통주 지분 33%와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산업개발의 지분을 다 더하면 35%가 넘는다. 그러면 현대중공업과 IPIC, GS가 30%대의 주식을 나눠갖은 공동경영에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다.
신영증권의 조용준 리서치센터장은 “현대중공업의 현금보유고가 3조 원 정도일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그는 “현대중공업의 재무적 성과는 탁월하지만 회사 안팎의 상황은 복잡하다”며 현대중공업의 고민을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이 관련된 인수합병전만 해도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현대오일뱅크 등 3개에 달한다. 이 중 현대건설 인수가액은 4조~5조 원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비해 현대오일뱅크 인수전은 1조 원대 미만으로 추정된다.
가격 문제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은 지주회사전환 문제도 걸려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정몽준 의원→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다.
오너인 정 의원의 제일 큰 고민은 개인 지분이 지극히 취약(10.8%)하다는 점이다. 이를 아산재단(2.53%)과 현대미포조선이 보충해주는 형식이라 현대중공업그룹의 지배구조개편은 발등의 불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이 지주회사체제로 재편될 때 현대오일뱅크 인수나 현대건설 인수 작업을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떤 형식으로, 어느 계열사가 누구와 파트너로 인수전에 나설지 여부도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
현대가의 2세로서 잃어버린 고토인 현대건설의 ‘수복’이 당위라면 이 작업은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나 KCC의 정상영 명예회장 등 범현대가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차원의 연장선상이라면 현대오일뱅크의 경영권 ‘회복’도 현대중공업으로서는 필요충분 조건을 갖춘 셈이다.
문제는 이 인수전을 현대중공업 그룹 중심으로 진행할 경우 ‘친야 성향’으로 통하는 무소속 의원인 ‘정치인 정몽준’과 현대중공업 오너인 ‘기업인 정몽준’의 미묘한 스펙트럼 차이가 충돌을 부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몽준 의원을 지배구조의 정점으로 놓는 지배구조 재편 작업이나 대형 빅딜에서 관련 당국의 개입과 ‘관찰’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때문에 이번 IPIC의 현대오일뱅크 매각작업 주체는 IPIC가 아니라 범현대가와 현대중공업그룹이라는 관전평이 나오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받고 있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