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스펙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잘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불안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회다. 올라갈수록 치열해지는 생존경쟁에서 언제까지 저렇게 자기를 짜내야 하는 부자연스런 열정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현실에서는 한때의 성공이 삶의 발목을 잡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는 ‘불안’이 넘쳐난다.
잘생긴 야구선수, 최고의 스타 최진실과의 결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시절을 뒤로하고 살 수가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성민의 죽음 앞에서 모두들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해도 해보지만, 이해보다도 ‘조금만 더 견디지’라며 듣지 못하는 말을 내뱉는 건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다. 이제 온 국민의 아들딸이 되어버린 환희, 준희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며 잘 커주기를 바라는 것도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얼마나 큰 보물이 있는지 종종 놓친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어렸을 적부터 등수 경쟁을 하느라 ‘비교’가 삶이 된 우리는 늘 바깥만 바라본다. 바깥만 바라보니 박탈감을 참기 힘들고, 박탈감에서 오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불혹을 넘기며 열정에 힘이 빠지면 사는 게 별 거 아님을 알게 된다. 별 거 아니니 화려한 것에 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 때를 넘기면서도 화려하게 사는 사람이 부러우면?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불혹이 왜 불혹인가? 혹하는 것을 그쳐야 하는 그 때, 그 때가 바로 ‘비교’를 접어야 할 때다. 그러면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고 “자유는 내면에 있다”는 융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쓸데없이 남에게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내가 아는 사람 모두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나에게 없듯 내가 아는 사람 모두가 나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버림받아도, 외면받아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차린 따뜻한 밥과 된장국에 감사하며 허기를 최상의 반찬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상대적 빈곤이 문제될 수 있을까.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 생각해 보면 그이는 가진 것 뒤에 숨어 사는 빈곤한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이 아는 척 하지 않는 일이 무슨 문제가 될까.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과 낭비할 시간은 없으므로.
일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처세나 돈벌이에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라 그냥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돈 많이 주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자. 그러면 녹록지 않은 삶, 환하게 웃으며 그래도 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리라 믿는다.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