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식에 참석, 이경숙 인수위원장 등 인수위원들과 함께 현판을 걸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4> 인수위 사람들
이명박 대통령은 ‘점령군(?) 인수위’의 수장(위원장)으로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을 임명했다. 10여 명의 위원장 후보가 있었던 것을 반추하면 ‘아주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 후보들이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위원장은 체급이 조금 달렸기 때문이었다.
16대 한나라당 대선 캠프의 원로회의 격이자 이명박의 멘토 모임인 ‘6인회’ 멤버들 중 최시중 전 한국갤럽 회장, 박희태 경선 선대위원장, 김덕룡 의원, 이재오 의원이 거론됐다. 박관용 선대위 상임고문(전 국회의장),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선대위 일류국가비전위원장), 안상수 원내대표, 이방호 사무총장,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도 당내 인사로 거론됐다. 윤여준 정운찬 손병두 어윤대 안병만 박세일 윤진식 한승주 류우익 송정호 이석연 등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인물 후보군도 많았다. 이명박의 고심이 얼마나 컸을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여러 후보 중 ‘누가 가장 적임자냐’가 아닌 ‘누가 되면 가장 말들이 많을까?’를 염두에 둔 듯 후보 한 명 한 명을 솎아내게 된다. 그게 실수였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해야 하는데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모양새였다. 한승주 류우익 송정호 등은 본인이 고사했다. 어윤대는 같은 고려대 인맥이라는 점, 정운찬은 “정체가 모호하다”(대선전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후보가 정 전 서울대 총장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했을 때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 최시중은 70세의 고령이었고, 박희태는 국회의장직을 원했으며, 박세일은 당내 반대가 극심했다는 점이 고려됐다. 이명박 주변인의 입김도 작용했지만 그 스스로 정치인 출신 위원장은 ‘친정체제’ 내지는 ‘당권장악’이라는 비판의 소지까지 있어 부정적이었다 한다. 결국, 이명박은 이경숙 손병두 안병만 중에 골랐는데 이경숙은 ‘대학 CEO’로서 개혁성과와 업무능력에 좋은 점수를 받았다. 손병두는 재계와 학계를 두루 거쳤다는 장점도 있지만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출신으로 ‘친재벌적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경숙의 낙점은 “같은 소망교회 장로(이명박)와 권사(이경숙)로서 2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게 큰 배경 아니었겠느냐”는 반응을 낳으면서 ‘고소영’ 논란의 시발점이 된다.
‘빨리빨리’라는 초고속 성장 기류 속에서 ‘건설통’으로 큰 이명박은 인수 작업도 재촉했다. 2007년 12월 27일, 대선이 불과 8일 지났을 때 이명박은 인수위를 발족했다. “일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정해 중요한 일은 될 수 있으면 1개월 내에 마무리해달라”고 주문한다. ‘박근혜 정부’가 해를 넘겨 2013년 1월 4일 인수위원을 발표한 것과 대조되는 모양새다. 박근혜 당선인은 ‘소규모 실무형’을 모토로 삼고 있다.
이명박 인수위는 2008년 1월 3일 금융감독위의 업무 보고를 받고서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현행 소유 10%, 의결 4%)를 높여주는 ‘금산분리 완화’ 방안을 제시했다. 이틀 뒤인 5일, 공정거래위원회 업무 보고 이후에는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폐지하고 지주회사 요건을 푼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친기업을 넘어 친재벌적이란 평가로 이어졌다. 금산분리 완화는 특히 삼성 총수 가문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이었는데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 속에서 민생보다는 기업환경을 우선시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 사실 이명박의 인수위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두는 ‘트리클 다운(물 흐름)’ 효과를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보는 듯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대기업이 잘돼야 중소기업의 일거리가 늘고 전체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명박의 논리였고 계산이었던 것이다.
“‘프레스 후렌들리’하게(언론친화) 하겠다 했더니 모든 신문 방송에 ‘프레스 프렌들리’ 이렇게 써놨거든요. (미국에서) ‘오렌지’ 달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아륀지’ 이러니까 ‘아 아륀지’ 이러면서 가져오더라고요.”
▲ 이경숙 위원장이 이명박 당선인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이명박 인수위는 20여 개의 국정 전략 목표와 200여 개의 세부 국정 과제들의 실익을 점검하면서 ‘2008~2012’ 시나리오 작성을 마쳤다. 하지만 그들은 차기 정부로 가져가서는 안 될, 꼭 버려야 할 살림살이에도 신경을 썼는데 특히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 하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자체 규명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또 일었다. 특별위원회나 조사팀은 아니지만 인수위 일부 분과에서 기존 업무와 별개로 ‘권력형 비리’와 관련한 정보수집과 검증을 진행했다는 것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과 각 기업 등에 투입된 공적자금과 대북지원 사업,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등을 들여다봤다는 것이 골자다. 인수위가 한나라당이 대선을 앞두고 구성한 ‘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수집된 팩트를 확인하는 정도였다고 해명했지만 ‘정치적 보복’이란 오해는 꽤 오래갔다.
이명박은 정치보다 경제를 우선시했다. 행정 경험은 있었지만 정치 경험은 적어 ‘풋내기 정치인’이란 비판은 임기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기업 조직이 정부보다 혁신적·효율적·생산적이라는 판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경제와 비교해 정치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라 생각했으니 실이 꼬여도 풀 길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가 이후 사사건건 정치권과 갈등을 빚었던 것도 이명박이 모든 것은 경제로 풀 수 있다고 자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군대가 20세기 중반 가장 앞선 조직이라면, 기업은 20세기 후반 이후를 이끌고 있는 프런트 조직”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는 정치인 중심이었고. 노무현은 학자 중심인 반면 이명박은 경제전문가 중심으로 꾸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됐다.
그렇다면 인수위 사람들을 한번 보자. 삼성 등 대기업 출신 인사가 많았다. 재경부나 금융감독원 출신 관료나 학자 가운데 미국식 ‘친기업 시장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도 포진했다. 사공일이나 엘던 두바이 회장이 대표적이다. 강만수나 윤증현도 대표적인 시장주의자들. 삼성 출신의 황영기나 지승림은 투자유치 TF에 배치됐다. 이건수 동아일렉콤 회장을 인수위원장 자문위원으로 뒀다. 미국에서 경제학 석·박사 과정을 마친 관료나 학자, 정치인이 많았다. 미국식 자본주의 이론이나 시장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셈이었다. 이명박의 첫 조각에서 이동관 대변인과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등 청와대 1기 수석 중 5명이 인수위 출신이었다. 청와대 2기 수석에는 맹형규 정무수석, 정동기 민정수석, 박형준 홍보기획관 등이 중용됐다. 윤진식 곽승준 이주호 이영희 유인촌 이달곤 현인택 등도 모두 인수위 사람들이었다. 최시중은 방송통신위원장이 됐다. 조해진 권택기 백성운 강승규 등 안국포럼 출신과 김효재 진성호 박준선 조전혁은 모두 금배지를 달았다. 인수위를 넘어 ‘이명박의 사람들’이 청와대와 정부, 국회까지 점령한 것이다.
최기서 언론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여의도동에 들어선 것은 1979년이었다. 그해 11월 16일 회관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키로 돼 있었으나 10.26 사태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신 참석했다. 회관 준공식 이후 전경련을 찾은 대통령은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은 한 번도 찾지 않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전경련의 대표격인 4대 그룹 회장들을 국회 식당에서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단골 음식점에서 전경련 회장단을 맞이했다. 정경유착을 의식한 탓이다. 이명박은 대선 직후 9일 만에 전경련을 전격 방문하면서 관례를 깼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나 노동계 파트너인 경영자총협회 등을 두고 재벌 회장단 중심의 전경련을 첫 방문지로 잡으면서 말을 키웠다. 노동자 관련 단체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