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통화기금의 원조를 받기 직전, 대한민국에는 풍요로움이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HOT·SES와 같은 기획형 아이돌 그룹의 탄생 등 소위 X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문화 영역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루던 시기였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그런 풍요로움이 빚은 사회 문제가 있었다. ‘오렌지족’이다. 재력가의 자제들이 서울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흥청망청 돈을 쓰며 밤거리를 누볐다. 튀는 옷차림을 한 채 “이렇게 입고 다니면 기분이 조크든요”라는 서울 사투리로 TV 뉴스 인터뷰를 하던 20대들의 장면은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회자되고 있다.
‘태풍상사’는 IMF와 오렌지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시대의 공기를 한데 뭉쳤다. 중소기업 태풍상사의 아들이자 오렌지족인 강태풍(이준호 분)이 회사의 몰락으로 아버지를 잃은 뒤 각성해, 태풍상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야기는 을지로를 배경으로 출발한다.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가 흘러나오고, 어지럽게 걸린 간판과 출근길 직장인의 모습이 당시 을지로의 활기찬 에너지를 보여준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던 시절, 사무실에는 각종 서류가 빼곡히 쌓여 있고 주판알을 튕기며 이익률을 계산한다. 이메일이 아니라 팩스로 원거리 정보를 주고받는 장면도 정겹다.

같은 시간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로 떠난다. 이 드라마의 제목의 ‘백번’은 버스 번호다. 1980년대, 100번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는 영례(김다미 분)와 종희(신예은 분)가 주인공이다. 삐삐조차 없던 시절, 그들은 공중전화로 소통하고 버스를 탈 때 토큰이나 회수권을 사용한다. 특히 40년 전 한국의 시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실제 당시 운영되던 버스 한 대를 구해 촬영에 활용했다. 1980년대 거리 역시 철저히 고증해 간판과 길거리 음식까지 배치했다. 카세프테이프를 파는 레코드 가게도 볼 수 있고, 당시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펜터스의 ‘클로즈 투 유’(Close to You)를 리메이크한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흘러나온다.

TV 예능 시장에서도 8090 음악을 소환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MBC ‘놀면 뭐하니?’는 ‘80s MBC 서울가요제’로 오랜만에 주목받았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아름다운 강산’, 바람에 멈추어 다오’, ‘사랑하기 때문에’, ‘이 밤을 다시 한 번’ 등 1980년대를 수놓은 명곡들이 후배 가수들을 통해 리메이크됐고, 그 결과 시청률 6.6%를 거뒀다. SBS가 신규 론칭한 ‘우리들의 발라드’에는 ‘비처럼 음악처럼’, ‘흩어진 나날들’,‘텅빈 거리에서’가 흘러나온다.
K-팝과 트롯으로 양분되던 TV에서 8090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은 반갑다. 그 시대는 김수희의 ‘애모’와 서태지와아이들의 ‘하여가’가 1위를 두고 다툴 정도로 다양성이 보장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추억팔이에 그치지 않는다. 지나친 쏠림현상과 팬덤 중심 콘텐츠의 매몰된 문화 시장이 다양성으로 무장한 시대의 공기를 소환해 허기를 달래려는 시도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