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민주당의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호언했지만 ‘돌고 돌아 문희상’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잇따랐다. 박은숙 기자 |
하지만 주변의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단지 그가 의외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의 대대적인 혁신과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문희상 비대위원장’ 카드는 “결국 또…”라는 반응을 낳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문 비대위원장 추대는 ‘뒷방’으로 물러난 줄 알았던 ‘올드 보이’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그의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과거 그는 민주당 내에서 손꼽히는 전략통이자 조직통으로 통했었다.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호남 출신이 아니면서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권노갑-김옥두-최재승 전 의원으로 이어지는 비서실장형, 보디가드형 인사들이 동교동계 구파로 분류된다면 문 비대위원장은 한화갑-배기선 전 의원, 설훈 의원 등 지략형 인사들과 함께 동교동계 신파로 분류됐었다.
1987년 DJ의 청년 조직인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 중앙회장을 맡으면서부터 시작된 그의 ‘화려한 시절’은 DJ 정부를 넘어 노무현 정부에까지 이르렀다. DJ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과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을 맡았던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면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당으로 복귀한 뒤에는 열린우리당 의장과 국회 정보위원장, 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화려한 경력뿐 아니라 성품도 온화해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인 문 비대위원장은 그러나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사퇴를 기점으로 당의 전면에서는 완전히 빠져 철저히 ‘원로’ ‘고문’의 역할에만 머물렀다. 리더로서 당을 이끌기보다는 막후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로 바뀐 지 오래 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4·11 총선 때 문 비대위원장이 다시 출마하자 당 안팎에선 그가 자신의 마지막 정치 행로로 국회의장을 설정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해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면 그가 국회의장 후보 0순위로 꼽혔을 것이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나 한국 나이로 69세에 이르렀다는 것뿐 아니라 그의 역할 자체가 민주당의 혁신과 변화를 이끌 비대위원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셈이다.
문 비대위원장이 추대되는 과정이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는 점도 ‘문희상 체제’ 출범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요인이다. 사실 박기춘 원내대표는 비대위원장 후보로 박병석 국회 부의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 부의장이 충청지역 출신인 데다 계파 색깔도 옅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원내대표의 이 같은 구상은 당내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친노(친노무현)그룹은 물론 486그룹과 비주류에게서도 거부당했다. 486과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박영선 의원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고, 비주류는 비주류대로 이석현 의원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486과 친노는 대선 패배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당 쇄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비주류는 박 의원이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점을 겨냥, 대선 패배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원혜영, 유인태, 김한길 의원과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도 비대위원장 감으로 거론됐지만 주류가 찬성하면 비주류가 반대하고, 비주류가 찬성하면 주류가 반대하는 식의 헛 공방이 계속됐다.
결국 박 원내대표는 당내에서 거부감이 덜하고, 누구든 함부로 비판하기 어려운 인사들 중에서 비대위원장을 찾았고 그 결과가 문희상 비대위원장이었다. 문 비대위원장 추대 과정 자체가 대선 패배 이후에도 민주당이 해묵은 계파 갈등에서 한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희상 비대위원장 체제’는 등장했지만, 그가 헤쳐 나가야 할 앞길도 결코 만만찮다. 문 비대위원장은 “당을 환골탈태시켜 우리를 지지했던 48% 국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드리겠다”면서 △냉정한 대선 평가 △패배 원인과 선거전략 분석 △차질 없는 전대 준비 △당 혁신안 마련 등을 약속했다. 하나하나가 다 만만찮은 과제들이다.
▲ 지난 12월 19일 대선 개표 방송 중 박지원 당시 원내대표와 문희상 의원이 휴대폰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사진공동취재단 |
그러나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문 비대위원장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민주당 내에서는 이미 3월말 전대를 통해 새 지도부를 뽑는 쪽으로 분위기가 잡혀 있다. ‘선출된 권력’도 아닌 문 비대위원장이 이 같은 당내 공감대를 거슬러가면서 쇄신을 주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대위원장에 취임하자마자 문 비대위원장이 잇단 설화로 곤욕을 치른 것은 그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수락연설에서 “민주당 혁신을 위해 당내 전 계파를 아울러 소중한 자원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선 평가위원회는 김한길 의원에게 맡기고, 문재인 전 대선 후보와 정동영 전 의장, 정대철 상임고문 등 자산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문재인 전 후보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비대위원장이 된 것 아니냐”는 비주류의 반발을 샀다. 문 비대위원장은 또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 문 전 후보에게 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처받은 지지자들에게 사과하고 위로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가 친노그룹으로부터 “전 대선 후보를 뺑뺑이 돌리겠다는 거냐”는 반발을 샀다.
문 비대위원장을 차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대 때까지 당을 이끌며 원만한 전대 준비를 하는 관리형 비대위원장으로 설정하더라도, 그 역할 또한 만만한 게 아니다. 특히 전대 룰(규칙)을 어떻게 할지 당내 교통정리가 결코 쉽지 않다. ‘모바일 투표’가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1월 전대와 6월 전대, 9월 대선후보 경선 등 3차례에 걸쳐 ‘모바일 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1월 전대 때만 조용히 넘어갔을 뿐 이후 2차례 모두 ‘모바일 투표’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됐다. 낮은 투표율과 지역별·세대별 편중, 디지털 격차로 인한 고령층 소외, 특정 세력의 조직 동원 논란 등이 끊이지 않으면서 “‘모발심(모바일 투표에 나타난 민심)’이 당심과 민심을 왜곡한다”는 시비가 계속됐다. ‘모바일 투표’에 대해선 특히 비주류의 거부감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모바일 투표’는 당헌당규에 반드시 하도록 규정돼 있어, 당헌당규 개정 없이 이를 없앨 수는 없다. 당헌당규 개정 과정에서 당내 계파가 정면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 비대위원장 체제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한 민주당 당직자는 “어차피 비대위원장 경선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의 힘’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희망처럼 문 비대위원장이 난세의 영웅이었던 조조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
올드보이들, 소방수로 다시 주목
민주통합당이 대선 패배의 혼란에서 당을 구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5선의 문희상 의원을 추대하면서 민주당 원로그룹이 다시 한번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 비대위원장과 함께 민주당 내에서 원로그룹으로 분류되는 인사들로는 김원기ㆍ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이해찬 전 국무총리, 유인태ㆍ원혜영 의원 등이다.
문 비대위원장과 김원기 전 의장을 뺀 나머지는 모두 재야 민주화 운동 출신이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동교동계는 문 비대위원장이 유일하다. 이들 중 1988년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임 전 의장과 이 전 총리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제왕적 총재로 활동할 당시 비주류로 머물면서도 전문성을 인정받아 요직에 등용됐던 인사들이다. 또 김 전 의장과 유ㆍ원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995년 DJ의 정계 복귀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반발해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했던 이른바 ‘통추 출신’들이다. 문 비대위원장을 뺀 나머지 인사들은 DJ 총재 하에서 ‘당 내 야당’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들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이끌면서 화려하게 비상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렸던 김 전 의장은 열린우리당 초대 당의장에 이어 국회의장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임 전 의장도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중 헌정사상 유일무이한 책임총리로 활동했다. 문 비대위원장은 노무현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유 의원은 초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다.
이들은 그러나 이 전 총리를 제외하면 당내에서 ‘친노 패권주의 세력’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국정운영 방향과 정책 등을 둘러싸고 노 전 대통령 및 친노 참모들과 적잖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문 비대위원장이 추대됐을 때 “친노도 아니고 비노도 아닌 중간”이라는 평가가 나온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같은 독특한 정치적 행로 탓에 이들 원로그룹은 이 전 총리를 제외하면 당내에 특별한 적이 없다. 재야 출신이 대부분인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념적으로는 당내에서 진보적인 쪽에 속하지만,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당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극심한 계파갈등으로 인해 감히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마다 이들이 구원투수로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이들이 전면에 나설 때인지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 대부분 원만한 리더십에 속하는 이들이 대선 패배의 ‘멘붕’을 딛고 강력한 당 쇄신을 이끌기에는 너무 약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박공헌 언론인
우린 ‘새끼손가락’ 건 사이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민주통합당 비대위원장에 문희상 의원이 뽑히면서 새삼 그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간의 친분도 화제가 되고 있다.
문 위원장은 2002년 한 일간지에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였던 박 당선인에 대해 “균형감각이나 역사의식이 뛰어나다. 한마디로 나무랄 데 없는 정치인”이라고 칭찬했고, 이에 대해 지난 9일 선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답해 문 위원장의 ‘박근혜 사랑’이 정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문 위원장은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한나라당 당사를 방문해 당시 대표였던 박 당선인에 대해 “프랑스에 가면 불어로, 스페인에 가면 스패니시로, 영어 국가에 가면 영어로 하고 조용조용한 분이 갑자기 외국어로 질문을 하니까 한층 돋보였다”며 2001년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한 인연을 언급, ‘절친’ 사이임을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걸며 상생정치를 약속하는 사진(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향후 개최될 국가지도자연석회의에서 만날 경우 지난 2005년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와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정치적 현안들을 논의하고 재보선에서 여야를 지휘하며 격돌한 지 8년 만에 다시 머리를 맞대게 되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내홍을 겪고 있지만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해 박근혜 정권의 초기 연착륙에도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 공치사를 정색하고 기대하는 것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라는 냉정한 평가도 많이 나온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