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역 최고령 배우로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이순재는 지난해 말부터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다. 지난해 10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출연 당시 건강이 악화돼 주치의로부터 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회복에 힘써 왔다. 그런 와중에 지난해 연말 'KBS 2024 연기대상'에 참석, 역대 '연기대상' 최고령 대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수상 소감을 통해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며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대상하면 이순신 장군이나 역사적인 인물 같은 그런 분들(연기한 배우)이 받았다. 얼마든지 중복해서 줄 수 있는 상이지만, 미국의 캐서린 헵번 같은 할머니(배우)는 30대에 한 번 타고, 60대 이후에도 세 번 탔다"며 "우리나라는 60세가 넘으면 전부 공로상인데, 60세가 넘어도 잘 하면 상 주는 거다. 공로상이 아니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날려 후배 배우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어 "이 자리까지 와서 격려해주신 여러분과 지금 TV로 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께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고 뭉클한 소회를 남겼다. 이 말은 고인의 마지막 공식석상 발언이 됐다.

이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그는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뒤 연극 집단 '떼아뜨르 리브르'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 대학 졸업 이후엔 동료 연극인들과 함께 국내 최초 동인제 극단 '실험극장'을 창단해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2년에는 KBS 개국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하며 안방극장으로도 활동영역을 넓혔다. 1965년 TBC 전속 1기 탤런트가 된 뒤로 이순재는 '한국 연기의 산증인' 답게 수많은 한국 방송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한국 드라마 역사의 중심인물로 자리잡았다. 출연작 중 자료가 소실된 것을 제외하고도 그의 필모그래피만 140편이 넘을 정도다.
30~40대 세대들에게도 이순재는 친숙한 배우였다. MBC '사랑이 뭐길래'(1991)와 KBS2 '목욕탕집 남자들'(1995)처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주말연속극에서 국민 아버지로 자리매김했고, 1999~2000년대 초 최고 시청률 64.8%를 기록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MBC 사극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 역을 맡아 당시 젊은 시청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순재의 연기내공이 정극에서만 빛을 발한 것은 아니었다. 2006년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자 망가질 땐 한없이 망가질 줄 아는 할아버지 이순재 역을 맡아 안방극장에 큰 웃음을 안겨줬다. 그간 이순재 하면 떠올랐던 카리스마 넘치고 과묵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야동 순재'라는 변신을 불사하면서 코미디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 그는 연기 스펙트럼을 다시금 증명하며 '국민 배우'의 입지를 한 번 더 확고히 했다.

70년에 이르는 연기 생활 동안 이순재는 제15회 부일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 제1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남우상, 제39회 황금촬영상영화제 연기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현역 최고령 배우이면서 동시에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활동 중단 이전까지도 후배 양성에 힘써 왔다.
긴 연기 생활 중 잠시 정치의 길로 빠지기도 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한 뒤 당선되면서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민주자유당 부대변인 등을 맡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순재의 도전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2013년 tvN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그는 신구, 박근형, 백일섭 등 당시 국내 현역 남자 배우 중 최고령이었던 동료들과 함께 세계를 넘나들며 배낭여행에 나섰다. 배우 이순재가 아닌 인간 이순재의 따뜻함과 유머, 솔직한 매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꽃보다 할배'를 통해 대중들은 그를 더욱 '친근한 할아버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후배 배우들도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2009)에서 이순재의 사위 역을 맡았던 정보석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에 "선생님,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연기도, 삶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자세도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라는 글을 남기며 고인을 애도했다.
정보석은 "제 인생의 참 스승이신 선생님, 선생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우리 방송 연기에 있어서 시작이고 역사였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심에 축하드리고, 아직 못하신 것을 두고 떠나심에 안타깝습니다"라며 "부디 가시는 곳에서 더 평안하시고, 더 즐거우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