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난 김지미는 덕성여고 3학년 재학 시절 우연히 고(故)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황혼열차'(1957)로 데뷔했다. 이 과정에서 김 감독과 투자사에서 지어준 '김지미'라는 예명이 마지막까지 대중들이 기억한 고인의 이름이 됐다.
1990년대까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전설적인 스타 배우로 꼽히는 김지미는 35년 간 7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육체의 길'(1959), '장희빈'(1961), '토지'(1974), '길소뜸'(1984) 등이 있으며 김기영을 비롯해 김수용, 임권택, 신상옥 등 당대 최고감독들의 다양한 작품에 주연으로 활약했다.
김지미는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관통한 상징적인 인물로도 기억되고 있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는 엄앵란, 최은희와 경쟁했고, 1960년대 중후반~1970년대 초반에는 당대 여성 트로이카로 불린 문희, 윤정희, 남정임에게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당대의 은막을 장식했던 이 같은 톱스타 여배우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선두에 남아있었던 것 역시 김지미였다.

1990년대 이후로는 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비대위 공동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며 한국 영화계 발전을 위해 앞장섰다. '충무로 여걸'의 이 같은 발자취는 후배 여성 영화인에게도 새로운 이정표가 돼줬다.
영화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고인은 '불 같은 사랑'을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처럼 파격적인 사생활이 그 배경이 됐다.
데뷔 이듬해인 1958년, 김지미는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준 작품 '별아 내 가슴에'를 연출한 홍성기 감독과 첫 결혼을 했다. 당시 김지미는 18살, 홍성기 감독은 그보다 16살 연상이었다.
결혼 4년 만인 1962년 9월 언론을 통해 이혼을 발표한 김지미는 같은 시기 유부남이던 스타 배우 최무룡과의 불륜 스캔들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간통 혐의로 최무룡과 함께 구속된 김지미는 이후 최무룡의 부인인 배우 강효실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최무룡과 재혼했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둔 두 번째 결혼 역시 이혼으로 끝났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이들의 이혼 선언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김지미는 이후 1991년 심장질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네 번째 결혼을 했으나 11년 뒤 이혼했다. 언론을 통해 자신의 결혼과 이혼사를 담담히 밝혔던 그는 "살아 보니 그렇게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 다들 어린애였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현역에서 은퇴 후 미국에서 여생을 보낸 고인은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김지미를 아시나요'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 그는 "나는 여배우에게 모든 걸 연기자로 끝을 내라고 이야기한다. 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일류가 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좋은 배우로서 칭호를 받게 되고, 남자와 여자 구별이 안 생긴다. 좋은 연기자가 되려면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정말로 연기만 보고 가야 한다"고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게 조언했다.
한편,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을 준비 중이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