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정치꾼이 되질 못했다. 일이 터질 때마다 “정치적 사고가 모자라기 때문”이란 말이 나왔다. 거중조정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정무적 기능이 중요했는데, 제대로 받쳐주어야 하는 이가 잘 하지 못했다. 그 주변부가 항상 갈등과 반목, 마찰과 싸움의 소용돌이가 된 이유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핵심부에 ‘끼어들 공간’이 커 보였기 때문에 실세들의 갈등이 항상 일었다. 이명박의 심복인 정두언 의원과 왕실세로 통했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이명박 주최 ‘권력 링’에 가장 먼저 오른 선수였다. 특히 박영준은 이명박 시대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예)로 불리며 무섭게 치고 올라오게 된다.
<5>정두언-박영준 매치
▲ 2010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신임당직자들과 가진 조찬 간담회에서 정두언 지방선거기획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
그 뒤 정두언은 이명박의 두뇌로, 박영준은 손과 발로 활약한다. 정두언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경선 캠프에서 상황실장을, 박영준은 네트워크팀장을 맡는다. 본선에서는 정두언이 전략기획총괄팀장으로 발탁되고 박영준도 같은 일을 한다. 그렇게 둘은 힘을 모았다.
껄끄러워진 것은 당선 이후다. 인수위원회 인선과 첫 조각을 두고 둘 간의 힘의 균형이 깨졌다. 박영준은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이 됐고, 정두언은 당선인 비서실 보좌역이 됐는데 보좌역은 이 당선인이 임의로 만든 직책이었다. 정두언은 이렇다 할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6월, 정두언은 박영준을 겨눈다. 청와대 실세참모 3명이 ‘전리품 챙기기’에 나섰다는 것인데 박영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A 수석보다 더 문제 있는 사람이 B 씨(박영준을 뜻함)입니다. 역대 정권의 실력자들을 보면 노태우 정부의 박철언,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 김대중 정부의 박지원, 노무현 정부의 안희정 이광재 씨가 있었죠. B 비서관은 이 사람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힘을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그는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음해하고 모략하는 데 명수입니다.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그런 분야에서는 정말 ‘엑설런트’해요. 대통령의 말이라며 호가호위한 거죠. 누가 대통령이 진짜 그렇게 말했나 확인할 수 있겠어요?”
정두언은 6월 9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인사 실패의 책임자는 그대로 있고, 실패한 인사의 결과만 바꾸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고, 12일에는 “끝을 보겠다”고 했다.
호형호제하던 둘 사이가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사실 정두언과 박영준의 싸움은 정부와 청와대 요직 인선을 하는 과정이 ‘힘겨루기’ 양상을 띠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인수위 인사를 주무르던 정두언이 정부와 청와대 인선에서 약발을 잃는다. 화약고는 정치권과의 가교역할을 하던 청와대 정무1비서관(여당 담당)과 정무2비서관(야당 담당) 자리였다. 정두언은 이 자리에 전직 의원 보좌관 출신인 L 씨와 당시 한나라당 한 의원 보좌관인 다른 L 씨를 추천했는데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자리에는 장다사로 전 이상득 국회부의장 비서실장과 김두우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앉는다. 박영준과 같은 출향인사란 점에서 정두언의 심기가 불편해진다. 앞서 정두언이 추천한 L 씨는 다른 자리로 가게 되지만 정부 출범 한 달 만에 돌연 사표를 써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분노한 정두언은 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이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가 불붙고 있던 때였다.
박영준은 억울했다. ‘조직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생각에 경선과 본선 때 전국 243곳 선거구를 6번 이상 돈 그였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당원 투표에서 진 것에 충격을 받은 이명박 당시 후보는 박영준에게 조직 정비를 지시했고, 그는 수행했다. 박영준의 선진국민연대가 회원 수 463만 명을 채우고, 이 후보가 집권 여당 후보를 530만 표 차로 이긴 것의 연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박영준은 드러난 수치에서 볼 때 분명한 ‘개국공신’이었다. 김영삼의 ‘민주산악회’나 김대중의 ‘연청’과 같은 조직을 만들었고 이를 인정받았으니 ‘이명박의 남자’라는 소릴 들었던 정두언으로서는 박영준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1차전은 정두언의 승리였다. 박영준은 “너무나 억울하다”고 주위에 항변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한 시간 동안 면담을 한 뒤 청와대에서 짐을 싼다. “대통령께 누가 된다면 청와대에 한시라도 더 머물 수 없다”며 당시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사표를 냈다. 나오는 길에 그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영준도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청와대 참모 인선 과정에서 정두언 의원은 50여 명가량의 명단을 (인선 팀에) 전달했다. 나중에 보니 그중에서 30명 정도가 관철됐더라. 정 의원이 추천한 사람이 청와대에 제일 많이 들어왔다. 정 의원이 청와대 인사에서 배제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8월 16일 장차관급임명장 수여식에서 박영준 지경부 2차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2차전은 권토중래하던 박영준이 청와대로 귀환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유럽과 동남아 등을 방문해 지인들을 만나 왔던 박영준은 국내에서도 흩어져 있던 중도세력을 모았다. 선진국민연대를 해체하고, 이를 지역 현안이나 녹색 성장과 관련한 단체로 바꿨다. “대통령의 의중과 정책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몸을 던질 때”라고 했는데 그 스스로 바로 적임자란 이야기였다. 2009년 1월, 청와대에서 물러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박영준은 총리실 국무차장으로 돌아온다.
정두언은 바로 쏘아붙이지는 못했다. 이 대통령과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촛불정국에서 이 대통령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지적이 제기된 때였다. 사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초기 인사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강부자(강남 땅 부자)+S라인(서울시청 출신)으로 된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가 S라인의 대표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정권 초기 난맥상의 단서를 제공해놓고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한 격이었으니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이 대통령 자신도 너무 위축돼 있었는 데다, 새 인물로 진용을 다시 구축해야 했음에도 시기를 놓치고 있었다. 당시 여의도정가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이후 이 대통령이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손발을 맞춰 일할 사람이 없더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영준이 저지른 사건이 많았다. 영일 포항 출신들의 모임인 ‘영포목우회’와 선진국민연대의 국정농단 사례가 등장했고, 이슈가 됐던 민간인 불법 사찰의 배후로 박영준이 지목됐다.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과 관련해 매장량이 과장됐다는 의혹의 배후에도 박영준이 지목됐고, 이곳저곳에서 게이트가 발발할 조짐을 보였다. 국정지지율은 추락해 정체됐으며 여권은 적잖게 동요했다.
2010년 7·14 전당대회에서 당 최고위원이 된 정두언은 당선 다음날인 15일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의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또 대통령 주변에서 충성을 빙자해 호가호위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당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영준에 대한 일종의 구두 경고장이었다. 그는 “(영포목우회 행태에)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라고도 했고, “선진국민연대의 국정농단 사례가 100가지도 넘을 것”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뒤 박영준은 “선진국민연대 출신 인사들이 메리어트 호텔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공기업 등 정부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는 민주당 전병헌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다. 그러면서 “허위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검찰에서 밝혀야 한다”고 말했는데, 여권 내 제보자가 있음을 우회적으로 경고한 것이다. 사실상 정두언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었는데 정두언과 달리 직접적이진 않았다. 그의 성격 탓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사실 박영준은 정두언을 경쟁자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깜냥이 정두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해 총선 정국에서 박영준은 대구 중·남구에 공천을 신청했다 낙천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여러 차례 정두언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만 했다. 따지고 보면 정두언이 일방적으로 펀치를 날렸고, 박영준은 맞다가 한 번씩 팔을 뻗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두 실력자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같다.
정두언은 저축은행사태와 관련, 관계자로부터 4억 4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는데 최근 검찰은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1억 4000만 원을 구형했다. 박영준은 서울 양재동 복합유통센터 ‘파이시티’ 인허가와 관련해 금품을 받고, ‘민간인 불법사찰’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기소 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최기서 언론인
한번 믿은 사람은 믿고 오래 쓴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신임을 얻기 어렵지 한번 믿으면 끝까지 간다. 하지만 호불호도 아주 강하다. 특히 그 스스로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홀로 공부해 대기업 임원과 대표까지 지내서 그런지, 곱게 자란 도련님 스타일은 아주 싫어한다고 한다. 특히 자기 머리만 믿고 말 많고 게으른 타입을 딱 질색이라 한다. 그가 집권하고서 여의도 정치인을 가급적 기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정무형보다는 실무형을 선호했다. 정두언과 박영준 중 누굴 더 신뢰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