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8일, 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과 개국공신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이 사실상 금품수수의 ‘공범 관계’라고 보도했다. 저축은행비리 합동수사단은 이상득이 2007년 말 임석 솔로몬 저축은행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는 자리에 정두언이 동석했다고 밝혔다. 받은 돈의 사용처를 수사하고 있지만, 이 둘이 공범으로 얽힌 것은 참 아이로니컬하다.
<6>이상득-정두언 갈등
▲ 2010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이상득 의원(왼쪽)과 정두언 의원이 나란히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행사에 참여했다. 일요신문 DB |
물론 일부 공천심사위원들이 “3선 이상의 중진과 고령은 공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때마다 등장하는 물갈이론을 폈고, 개혁 공천의 상징으로 ‘3·4선 이상 중진, 70대 이상 고령, 영남권’은 모두 갈아치워야 한다는 분위기도 컸다. 하지만 이상득은 정면돌파해 공천을 받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개혁 공천은 물 건너갔다. 이상득의 덕을 본 이들도 많았다.
당시 이상득의 불출마를 앞장서서 외쳤던 인물이 정두언이다. 인수위에서 자기 사람을 심는 데 실패하면서 소위 ‘끗발이 죽은’ 정두언은 여의도 챔피언에게 도전하면서 ‘정치 덩치’를 키우고자 했다. 취지는 반듯했다. 이상득이 앞으로 야당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거중조정 역할을 하게 된다→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 씨 등 직계가족 비선조직을 가동하면 정권 말로가 좋지 않다→막판에 이들의 비리로 정권이 흔들렸다→형통령(兄統領)을 내보내야 한다’는 논리는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대통령의 형으로 친이명박계의 대부였지만 사실상 이상득은 친박근혜계와 꽤 가까웠다. 정두언의 도발이 힘을 받지 못한 것은 친이계를 공격하면서도 친박계의 협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득은 당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대표에게 적대적인 이재오와는 달랐다. 그는 온화했다. ‘정치적 완충지대’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5선에다 당시 일흔셋이었던 고령의 이상득이 공천을 받으면서 친박계 여럿이 살아났다. 정두언을 주축으로 한 소장파가 한나라당의 축이었던 영남 주류를 대체하고자 고군분투했으나 포항 남구와 울릉군이 지역구였던 이상득이 방패막이가 됐다.
지난 이야기지만 공천심사위가 이상득의 공천 여부를 놓고 고민했을 때에도 “공천을 받아야 한다”는 쪽은 친박근혜계였다. 총선 정국에서 탈당했던 친박계가 복당하려 하자 이상득은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복당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결단하면 총선 이후 다 같이 함께하리라고 본다”고 했다. “복당은 없다”던 이방호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와는 다른 스탠스였다. 이상득은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나 친박계의 수장 홍사덕 등과 친하다. 박근혜 당대표 시절에는 사무총장을 지냈다.
거기에다 이상득은 ‘스스로’ 아주 강한 사람이 돼 있었다. 2인자 이재오에 빗대 ‘1.5인자’로까지 불린 이상득에겐 든든한 아군이 여럿 있었다. 11년간 자신을 모신 박영준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이었고, 같은 보좌진 출신인 장다사로는 청와대 정무1비서관에 앉아 있었다. 오랜 친구인 최시중은 방송통신위원장이었고, 코오롱 후배인 김주성 씨는 국정원 기조실장에 임명된 상태였다. 청와대, 언론정책 기관, 정보기관 삼각편대에 측근이 두루 포진해 있던 이상득이 골리앗이었다면 정두언은 다윗에 불과했다.
정두언은 분했을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다. 정두언 주도로 대선준비팀이 만들어졌고, 이를 모태로 선거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개국 선봉대에 있던 그인데 인수위 인선에서부터 물을 먹더니, 청와대 구성과 내각 인선에서 번번이 발목 잡혔고, 공천에서 힘 한번 쓰지 못했다. 그의 절친이 낙천했을 때, 정두언이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2011년 5월 ‘3D 산업 글로벌 강국 도약의 길’ 전시회에서 3D TV를 시청하고 있는 정태근·정두언·이상득 의원(왼쪽부터). 뉴시스 |
그로부터 석 달 뒤다. 정두언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이상득 의원,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장다사로 정무1비서관이 권력 사유화 4인방’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모든 언론이 이를 받아썼고 정치권은 이를 ‘정두언의 난’으로 불렀다. 하지만 류우익과 박영준이 물러나는 선에서 마무리됐고, 이상득은 건재했다. 정두언의 연패가 이어진다.
이로써 범이명박계 내부도 분화하게 된다. 이상득-이재오-소장파의 삼각축이 헝클어지면서 한나라당은 계파와 파벌 싸움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 우위는 이상득에게 있었다.
2008년 그 해, 이상득 작품으로 보이는 박희태 당대표-홍준표 원내대표 조가 소장파들이 민 안상수 당대표-정의화 원내대표 조와 붙었는데 안-정 조가 포기하게 된다. 박희태는 이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으로 6인회 멤버였고, 박 전 대표의 러브콜에도 이명박 캠프로 향했던 대표적인 이명박 사람이었다. 이상득에 힘이 더욱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득과 정두언의 ‘파워게임’은 조용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2009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급속화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다. 정두언과 함께 친이직계인 권택기 김용태 임해규 정태근 조문환 차명진 7인은 “이명박 정부는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을 중단하고, 이상득 의원은 2선으로 후퇴하고, 박희태 당대표는 퇴진하고, 박근혜 전 대표는 전당대회에 출마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명 ‘7인의 사무라이’였다.
그런데 이상득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해 6월 3일이었다. “2선으로 물러나 자원외교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히고 이상득은 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이 승부가 왜 무승부로 회자하는지는 이상득의 추후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지역구 활동에 집중하고 해외에서 막후 외교관으로 선전하면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가 소장파들에게 한마디 한 적이 있다.
“참 나쁜 사람들이야. 치고 빠지고…전형적인 운동권식이야. 에이 그런 말 안 할래, 대응해봤자 같은 사람이 되고, 참아야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득으로선 격정 토로다.
정치권에 좀처럼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이상득이지만 물밑에서는 일한 듯하다. 2010년 8월 31일.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정·남·정’(정두언 남경필 정태근) 트리오가 당의 쇄신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남정은 “청와대와 국정원에 의해 (불법) 사찰이 이뤄진 것을 이상득 의원이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사찰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분이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겠다”며 배후설을 내놨다.
당시 이상득계인 장제원 의원은 트위터에 “공개석상에서 새까만 후보가 선배를 정면 공격하는 것은 패륜”이라는 글을 올렸을 정도니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상득은 원치 않았던 많은 구설에 휘말렸다. 당시에 불거진 ‘영포회’ 논란은 총리실의 불법사찰 의혹과 인사전횡 의혹이 결합된 양태였는데 그 배후에 이 대통령 고향인 포항 출신과 포항에 통합된 영일 출신 고위공직자 모임인 영포목우회가 개입했다는 야당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두언은 그 이후에도 이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화두로 내놓자 그와 관련한 간담회 등을 주최한다. 그러면서 정두언은 “(공정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정책보다 중요한 것이 자기 개혁이다. 공공기관에서 법적 근거도 없이 민간인과 정치인을 대상으로 사찰을 하고 컴퓨터도 파괴했는데 실무자만 구속되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외교부에서는 특채 파동으로 인사기획관이 징계받고, 기조실장이 직위 해제되고, 차관도 인사권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두 기관의 사후처리가) 과연 공정하게 비칠 수 있겠는가?”라며 이상득을 사사건건 겨눈다.
이상득은 소장파들의 공격에 대해 이런 회한을 내놓았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많이 후배고, 내가 그래도 자기들보다는 나이와 선수도 많은 사람인데, 젊은 사람들이 그러는 데 대해서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어요. 법적으로 잘못됐다면 법에 호소해서 나를 고발하면 되고. 기업인과 정치인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느낀 건데, 여론에 의해서 결국은 진실이 밝혀지더라고.”
소장파의 반란에 빠지지 않았던 김용태는 우연히 이상득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회사에서 오래 일해 본 사람은 알거야. 아랫사람들은 세상천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하다 보니 회사를 자기가 세운 것처럼 생각하지. 그런데 오너는 종업원의 차에다 마일리지 기록계를 달아놓는단 말이야. 회사의 주인은 오너 일가이고, 종업원은 오너의 감독 하에 열심히 일할 뿐이야. 그리고 오너의 판단에 따라 보상을 기다릴 따름이지.”
결국 오너는 이명박과 그 가족이며, 나머지는 종업원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최기서 언론인
박영준은 이상득을 11년간이나 모신 보좌관 출신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영준의 득세는 곧 이상득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상득이 박영준에 대해 꺼낸 말이 있다. 2010년 8월 13일 단행된 차관급 인사에서 박영준이 총리실 국무차장에서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옮겨갈 때다.
“(박영준이 차관이)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은 거지. 대통령이 필요하면 언제든 쓸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한테 박영준 좀 시키지 말라고 하는데 박영준 시키는 사람이 대통령이지 나인가요? 내가 대통령 보고 시키라, 시키지 마라 할 수 있나요? 내가 그렇게 말할 바보가 아닙니다. 대통령도 형님 말 듣고 친인척 말 듣고 인사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 간다고 해서 내게 이득도 손해도 아무 것도 없어요.”
이상득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 박영준의 이명박 정권 ‘출세기’를 보면 두 사람은 철저하게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