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끈이 자꾸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들의 무죄를 증명할 수백 장의 서류를 하나로 묶으려던 남자의 손끝이 잘게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끈을 돌려 고를 만들려던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매듭을 짓는 데 성공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겸연쩍은 듯 웃는 눈매는 아들과 꼭 닮아있었다. 남자는 28년 전 ‘대구 장미비디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무기수 이민형 씨의 아버지다.

재심청구서 분량만 A4 용지 508쪽. 증거와 참고자료를 합하면 실질적인 부피는 그 곱절을 훌쩍 넘는다. 성인 남성 두 명이 나눠 들기에도 벅찬 이 서류더미에는 이 씨가 다시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빼곡히 담겼다.
대구 장미비디오 사건은 1998년 1월 3일, 대구 남구 대명동의 한 비디오 대여점에서 30대 여성 점주가 6세 아들 앞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월 5일, 현장 인근에서 불심검문으로 체포된 탈영병 이민형 씨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이 씨는 경찰의 강도 높은 수사 끝에 자백했으나 1심 선고 이후부터 현재까지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고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수사기록 곳곳에서 발견된 조작 정황

재심 청구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수사기관의 직무상 범죄와 이 씨 자백이 허위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들이다. 특히 경찰과 군검찰, 군판사가 저지른 각종 직무상 범죄 사실이 적시됐다. 폭행 등 가혹행위를 비롯해 위법한 압수와 허위공문서 작성,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진술거부권 침해 등이다. 박 변호사는 “수사와 재판 전반에 위법과 부실의 흔적이 가득하고 자백은 모순과 비약으로 점철돼 있다”고 지적했다.
자백을 보강한다는 증거들 역시 조작되거나 오염된 정황이 짙다. 실제로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목격자들의 진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로 모였다. 초기에는 ‘가방을 들고 도망갔다’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검정색 양복차림이었다’ ‘남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등 제각각이었던 최초 진술들은 수사 단계가 진행되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일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사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는 허위로 작성된 공문서를 통해 증명된다. 경찰 압수조서에는 1998년 1월 6일 오후 11시 30분, 이 씨와 동행해 증거물을 압수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각 이 씨는 군경찰에 넘겨져 취조를 받던 중이었다. 심지어 오후 11시 30분에 압수했다는 그 물건들은 이미 3시간 전 저녁 뉴스 화면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뒤였다.
2심 재판을 맡은 군판사는 현장검증을 진행하며 진술거부권 등의 권리를 고지하지 않고 전 단계에 없던 내용까지 재연시켰다. 이 씨가 참여한 적 없는 증인신문조서 참석란에 이 씨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 허위공문서 작성과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높다. 이 씨는 현장검증 이후 열린 공판기일에서 “범행을 인정하여 한 재연이 아니었다”고 진술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기 고문하고 알몸 사진 찍어”

박 변호사는 “이 그림들은 피고인이 허위자백에 이르게 된 심리적 상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이자,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당시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수사관들도 최근 폭행 사실을 일부 시인했다. 이 씨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경찰은 2025년 7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을 만나 그때를 회상하며 “몇 대 때리긴 했는데 애가 순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 2명은 “기억이 잘 안 난다”면서도 “그때는 고문도 많이 했다. 자백을 안 하면 할 수 없이 고문을 하는 것”이라며 고문 악행을 인정했다.
“3층에 3분의 1은 그, 고문실이라 고문실. 원래 그, 인권 면에서는 그, 그 고문실이 있으면 안 되는데…”
“물고문! 물로 가지고 이제 코에 부어 가지고, 그 다음엔 고춧가루 고문, 그 다음에 막대기…”
“두드려 패기도 하고…”전부 당시 수사 경찰이 직접 말한 “(용의자가) 자백을 안 하니까 하게 되는” 고문 기법이다.
#무죄 입증할 새로운 증거
당시 수사기관은 이 씨가 대구 북구의 한 의원에 침입해 현금 30만 원과 접이식 칼 1개를 훔쳤고, 이를 범행에 사용했다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중요 근거인 칼의 출처가 원장 A 씨의 불안정한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A 원장은 사건 초기 “도둑이 든 것은 맞지만 칼은 도난당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가 법정에선 “도난당한 것이 확실하다”고 번복했다. A 원장의 진술은 이 씨의 유죄를 확정 짓는 주요한 증거 중 하나였다.
그런데 A 원장은 최근 다시 한번 말을 뒤집었다. 그는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과 만남에서 범행도구로 지목된 칼과 유사한 접이식 칼을 보며 “이런 칼은 사 본 적도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평생 외과 전공을 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흉기로 인정될 정도의 칼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없어요. 나는 이런 칼 사용한 적이 없어요. (칼을 펼쳐보며) 이거는 완전 흉기고. 이거 진짜 날카롭네. 이렇게 날이 선 칼은 호주머니 넣고 못 댕기거든요. 이런 칼 넣고 댕기다가 어디 잡히면, 이거는 흉기로 걸려도 걸리죠.”그러면서 사건 발생일로부터 8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서의 법정 증언보다 1개월 지난 시점에 했던 경찰 조사에서의 진술이 사실에 더 부합하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이상한 게 그래. 그럼 처음에 그래 내가 도난당했다 카지 도난당했으면. 8개월 아닙니까? 그때 와 가지고 다시 조사를 받을 때 내가 도둑맞았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조금 이상하잖아요.”그럼 어떻게 A 원장의 증언이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됐던 것일까. A 원장은 수사기관의 압박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걸로는 증거가 부족하니까, 나를 압박해 가지고 다시 이렇게 좀 써 달라고 했을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많이 하잖아.”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시 수사기관이 부족한 증거를 보완하기 위해 원하는 대로 진술을 끌어냈을 수 있다는 취지다.
설령 경찰의 조사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흉기와 피해자의 몸에 남은 자상이 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시체검안서에 기록된 상처의 깊이는 최대 11cm인 반면, 범행 도구로 지목된 칼날은 10cm 남짓이었다. 10cm 길이의 칼로 11cm 깊이의 자상을 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상처의 폭 역시 마찬가지다. 자상의 폭은 최소 2cm로 추정되지만 이 씨가 그린 그림 속 칼의 폭은 0.8cm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장기나 내부 조직은 수축하기 때문에 상처의 깊이가 줄어들 수는 있어도, 칼날보다 깊게 확대되는 경우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흉기의 궤적뿐 아니라 자상의 위치조차 이 씨의 자백 내용과는 달랐다.

범행 직후의 행적에서도 의문은 이어진다. 자백대로라면 이 씨는 살인 후 돈통에서 돈을 꺼내 도주했다. 그러나 금고에서는 주인 부부의 지문만 확인되었을 뿐 이 씨의 지문이나 혈흔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13차례나 흉기를 휘두른 범인이 피 묻은 손으로 돈을 챙겼음에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번 재심청구서에는 사건 당시와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한 과학적 재현 실험 결과가 새로운 증거로 포함됐다. 임시근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가 주도한 실험에 따르면, 손톱이 긴 상태에서 혈흔이 묻을 경우 단순 세척만으로는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려웠다.
감식 기법에 따라 결과는 엇갈렸으나 도출된 결과는 유의미했다. 혈액 성분을 육안으로 판별하는 LMG 검사에선 반복 세척 시 일부 음성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미세 혈흔을 추적하는 루미놀 검사에선 손톱 틈새에 박힌 극미량의 혈흔이 포착됐다. 손톱 안쪽의 거친 구조적 특성 때문에 일반적인 세척 후에도 ‘점상 발광(점 모양의 빛)’ 형태의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실험의 결과와 과학적 의미 등을 임 교수의 의견서 형태로 추가 제출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재심청구서엔 관련자들 위증과 목격자들 증언 모순점, 허위 자백 이유 등이 포함돼 있다. 박 변호사는 향후 재심보충서를 통해 추가 증거들을 재판부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씨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진실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의미다.
#“죽이지 않았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형을 언도받고 돌아설 때, 어느 아주머니께서 제 두 손을 꼬옥 잡아주셨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라고, 힘을 내라고…부모님조차 찾아와 주지 않은 저에게 희망을 건네며 눈물을 흘리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전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은 포기의 눈물이 아닌 제 인생의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의 눈물이었습니다.” (1998. 6. 9. 항소이유서 중)이 이름 모를 아주머니의 눈물은 당시 사형수였던 이 씨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헌병들은 항소를 권유했고 형무 계장은 탄원서를 써줬다. 이 씨는 일면식도 없던 이들에게서 받은 사랑이 진실을 밝히는 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죄를 시인하면 감형을 받을 수 있다는 회유에도 그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다.
그리고 28년이 지난 지금, 이 씨는 그날의 진실을 묻기 위해 다시 한번 법원 앞에 섰다.
“전 결코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제게 또다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주어진다 해도 이 주장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말입니다.” (1998. 6. 9. 항소이유서 중)
“이번이 안 된다면 다음번, 다음번이 안 된다면 또 다음번 저는 언제까지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게 허락된 시간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1998. 10. 13. 상고이유서 중)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