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1985년 설립 이후 정보통신기술(ICT)과 방송 분야의 국가 중장기 전략 수립 및 정책 연구를 전담하는 ICT 싱크탱크로 꼽힌다. 상명대학교 부총장 출신의 배 전 원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신성장동력특별공동위원장을 맡은 뒤,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23년 8월 3일 KISDI 수장 자리에 올랐다.
#연구원 돈으로 마추픽추 관광…해외 출장엔 지인 끼워넣기

문제는 현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무조정실 감찰 자료에 따르면 배 전 원장은 12월 9~10일까지 예정된 페루 교통통신부 1차 회의와 기술정책협력단 내부회의 일정에 참석하는 대신 항공편으로 왕복 8시간 거리인 마추픽추로 1박 2일 관광여행을 떠났다.
배 전 원장의 마추픽추 관광비용 460달러와 비즈니스석 항공 수수료, 마추픽추에서의 숙박비용까지 모두 연구원 출장비로 처리됐다. 마추픽추에 머무는 동안 기존 호텔 예약을 취소하지 않아 숙박비가 이중 결제되기도 했다. 배 전 원장이 대신하겠다던 발표는 원래 맡기로 했던 전문가가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KISDI 임직원 행동강령 제12조는 임직원이 출장비 등 업무수행을 위한 예산을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해 연구원에 재산상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구원 공식 해외 출장에 업무와 무관한 지인들을 동행시키기도 했다. ‘과기부 정보통신기술 ODA 사업 캄보디아 사전타당성조사’와 ‘가나 5G 이동통신 구축 및 5G 환경에서의 정보보안 정책자문 현지 심층조사’ 출장이 대표적이다.
배 전 원장은 출장 명단에 특정 언론사 부사장과 과거 자신이 대학에 근무할 때 함께 일했던 교수를 포함시키라고 지시했다. 실무 담당 연구원들은 해당 인사들의 전문성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배 전 원장은 이를 무시하고 지시를 관철했다.
출장 이후 업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배 전 원장은 ‘2024 이동통신 국제전시회(스페인 바르셀로나)’와 ‘AEA·CES 2024(미국 샌안토니오·라스베이거스)’에 단독으로 출장을 다녀온 뒤, 출장 결과 보고서 작성은 비서실 직원들에게 떠넘겼다. 현지에 동행하지 않아 내용을 알 리 없는 직원들은 인터넷 자료와 보도자료를 뒤져 보고서를 채워 넣었다. 배 전 원장은 보고서 작성을 위한 어떠한 기초 자료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회식자리에서 부하직원 성추행…국무조정실 “비위에 해당”
배 전 원장은 부하직원 성추행 의혹으로도 감찰을 받았다. 그는 2024년 3월에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여성인 부하직원 A 씨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게 하고 회식이 끝나고 난 뒤 해당 직원을 껴안은 것으로 나타났다.
배 전 원장 측은 포옹이 아니라 악수만 했을 뿐이라고 부인했으나 목격자들의 증언이 뒤따랐다. 이날 현장에 있었던 한 직원은 “다른 직원들과는 악수를 하고 A 씨에게는 ‘A 예뻐’라고 하면서 양팔로 둘러 껴안아 당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A 씨 역시 국무조정실 감찰 조사에서 “원장이 안아 부끄럽고 수치심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국무조정실은 이를 배 전 원장의 비위로 인정했다.
#부하직원에게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냐”…노조 탈퇴 강요도

같은 해 11월에는 한 정부 부처에서 KISDI 연구원의 해외 출장 요청이 오자 배 전 원장은 “공무원 뒤치다꺼리하는 것은 용납 못한다. 차관이나 실장이 나에게 와서 부탁하면 모를까”라며 출장을 불허했다.
필요한 결재는 제때 처리하지 않았다. 배 전 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연구용역·수탁과제·자문위원 위촉 등 주요 업무 결재를 미뤘다. 10일 이상 지연된 사례는 44건, 20일 이상은 16건에 달했다. 결재 한 번을 받기 위해 42일을 기다린 사례도 확인됐다. 이와 관련, KISDI의 한 직원은 “배 전 원장이 출근하는 날이면 직원들이 결재를 받기 위해 줄을 섰을 정도”라고 말했다.
반복된 결재 지연은 예산 낭비로 이어졌다. 2023년 11월 상신된 전산실 유지보수 계약은 한 달이 넘게 지난 12월 말에야 결재됐고, 클라우드 유지보수 계약은 결재가 미뤄지는 사이 단가가 올라 이듬해 초 1000만 원 인상된 금액으로 체결됐다. 2024년 2월에는 조사연구 계약직 채용 결재가 45일 이상 지연됐다.
배 전 원장은 연구원의 주요 정보시스템을 관리하는 디지털자료팀(전산팀) 직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노조를 탈퇴하도록 강요했다.
2023년 11월 6일, 배 전 원장은 전산팀 직원 B 씨에게 “노조에 계속 가입하고자 하면 선택을 해야 한다. 노조 가입을 유지한다면 전산직을 포기해야 하고, 전산 업무를 모두 외주로 돌리고 일반 부서로 발령내겠다”고 말했다. 노조 활동 여부에 따라 직무 자체를 박탈하겠다고 압박한 것이다.
열흘 뒤인 11월 16일에는 전산팀 팀장에게 “전산팀 직원 모두 노조원인 것은 문제”라며 “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알아서 행동하라. 일주일 내 답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 3권으로 전산 담당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제한될 수 없다.
#내부엔 ‘엄격’했지만 본인에겐?… 8개월간 출근 기록 없어
배 전 원장은 전 직원의 유연근무와 출장, 연차 신청을 반드시 7일 전에 완료하도록 지시했는데, 정작 본인의 복무관리는 그렇지 않았다. 2023년 8월 취임 이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8개월간 근무상황부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국무조정실에서 관용차량 하이패스 이용내역을 조회한 결과, 근무지 외에서 사용된 100건 가운데 출장·해외 출장·대외활동 등으로 확인된 29건을 제외한 나머지 71건은 행선지와 목적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외부 강의 사례금 신고의무도 지키지 않았다. 배 전 원장은 2023년에 서울시 제안서 평가(20만 원), 한국교통안전공단 제안서 평가(두 차례 총 60만 원),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제안서 평가(20만 원), 서울대 산학협력단 자문(30만 원) 등 5건에 걸쳐 총 130만 원의 외부활동 사례금을 받았으나 감사부서장에게 사전 신고를 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상임임원 복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기관장은 외부강의 시 일시·장소·주제·사례금·요청기관 등을 감사부서장에게 사전 신고해야 한다.
#“해임 인정 못 한다” 2년째 불복 소송
국무조정실은 2024년 5월 10일 감찰 조사 결과 확인된 6가지 비위 사실 △외유성 해외출장 △성추행 △복무관리 위반 △해외출장 지인 동행 및 출장보고서 대리작성 지시 △갑질 △노조 탈퇴 강요 등을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 통보하고 조치를 요구했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이를 근거로 2024년 7월 배 전 원장을 해임했다.
배 전 원장은 즉각 법적 다툼에 나섰다. 2024년 8월 해임 효력을 잠시 멈춰달라는 가처분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같은 해 11월에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를 상대로 본인이 여전히 원장 지위에 있음을 확인해달라는 원장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지난 1월 21일 “징계 사유 중 성추행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사유들이 인정되고 결코 가볍지 않다”며 “해임을 결정한 이사회의 판단이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볼 수 없다”며 배 전 원장의 청구를 기각했다.
배 전 원장은 지난 2월 항소하고 현재까지도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일요신문은 배 전 원장 입장을 듣기 위해 4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카카오톡 등으로 서면질의서를 보냈다. 배 전 원장은 질의서를 읽고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