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분에 달하는 영화는 두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자극적이고 빠르게 몰아붙이기보다 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해고와 파업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호석과 미옥,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예지, 그리고 예지와 다른 방식으로 돈과 계급을 체감하는 상우가 한데 엮이면서 처음에는 쉽게 구분될 것 같았던 관계의 선도 조금씩 흐려진다.
그 가운데서도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려 하고 실제로 그들과 가까워지지만 타인의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행위에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끊임없이 윤리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한다면서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자신의 삶을 마치 공기처럼 당연히 여기는 예지와, 일상을 누리는 것조차 아등바등해야 하는 호석·미옥 부부 사이에는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좀처럼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창동 감독 역시 이 부분을 자신의 오랜 고민과 연결했다. 9월 21일 언론배급시사회가 끝난 뒤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타인의 삶을 그리는 저 같은 창작자에게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그들로서 할 수 있을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며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거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고, 지금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당초 이 감독은 10여 년 전 대기업의 대량 해고와 파업, 강제 진압 사건을 접한 뒤 큰 충격을 받은 일을 계기로 '가능한 사랑'을 처음 구상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자격이 있는지, 해고 노동자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확신이 없어 한 차례 영화화를 포기했다고도 설명했다.
이후 시간이 지나 노동에 대한 시각 자체가 바뀌고 시나리오에 다큐멘터리 감독 이야기가 들어오면서부터 '가능한 사랑'의 제작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캐릭터인 예지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윤리적 문제, 태도의 문제를 함께 다루면서 비로소 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설경구는 해고 이후에도 과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호석을 연기했다. 일자리와 그로 인한 삶의 안정을 송두리째 박탈당한 호석의 감정은 분노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자아가 깨진 상태로 수치심과 죄책감, 무력감이 뒤엉킨 채 오랜 시간 쌓인 감정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설경구는 호석을 두고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해고 이후 점점 위축되는 과정을 생각했고, 상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복합적인 마음을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조여정이 연기한 예지와 조인성의 상우는 호석·미옥 부부와 놓여 있는 환경부터 다르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들만의 욕망과 결핍을 가진 다층적인 인물로 표현돼 부유함이 곧 충만함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인성은 상우에 대해 "감독님과 이 캐릭터를 만들 때 기존의 자본가 모습에서 나아가 현재 가진 자들이 어떻게 우리와 밀접하게 붙어있는지를 새롭게 그려내려 했다"며 "돈에는 독이 있다고 생각한다. 잘 쓰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날카로워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조여정은 "제 삶에서 채우지 못하는 그 무엇을, 남의 인생을 통해 내 영화에 담으려 탐하는 마음으로 예지를 연기했다"며 "예지는 호석과 미옥을 만나면서 충만한 삶이나 관계가 경제적인 안정감과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네 인물을 통해 '가능한 사랑'이 보여주고자 하는 길은 해외 평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국 가디언은 두 부부의 관계를 통해 착취와 우정을 세밀하게 다룬 작품이라고 평가했고, 스크린데일리 역시 돈이 두 부부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계급과 욕망, 착취의 문제를 점층적으로 쌓아 올린다고 평했다. 또 타임아웃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함께 현대 사회의 계층 분화를 들여다보는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 있는 작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창동 감독에게는 2002년 '오아시스'로 베니스 감독상을 받은 이후 24년 만의 수상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이날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상은 결과물"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감독은 "상보다 이 영화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관객과 처음 만나는 자리가 베니스영화제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줄까가 훨씬 더 중요했다"며 "쉽고 자극적인 영화가 아닌데도 관객들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기뻤다"고 말했다.
베니스 이후 해외 행보도 이어지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올해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감독 최초로 TIFF 에버트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가능한 사랑' 역시 토론토에서 국제 관객상 부문 차점작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밀밸리영화제에서는 이창동 감독에게 한국 감독 최초로 오퇴르상(Auteur Award)을 수여할 예정이다.
오스카 도전도 본격화됐다. 영화진흥위원회는 '가능한 사랑'을 제9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한국 출품작으로 선정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한국 대표작으로 선정된 것은 '오아시스', '밀양', '버닝'에 이어 네 번째다. 특히 '버닝'은 2018년 한국영화 최초로 당시 외국어영화상 쇼트리스트(예비 후보)에 진출했지만 최종 후보에는 들지 못해 이번 '가능한 사랑'의 레이스 결과에 더욱 뜨거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능한 사랑'은 9월 23일 일부 극장에서 개봉해 스크린을 통해 먼저 관객을 만나고, 넷플릭스에서 11월 6일 공개된다. 이 감독은 "영화가 만들어져도 결국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라며 "'가능한 사랑'이 관객을 만나면서 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164분, 청소년 관람불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