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이 이상득에 대해 다소 직접적으로 도발하는 편이었다면, 이재오는 링 위에 본인이 직접 오른 적이 없다. 마치 인형극을 하듯, 이재오의 대 ‘이상득 투쟁’은 보이지 않는 실을 묶어 대리인을 앞세웠다는 것이 더 객관적인 총평일 것이다. ‘쌍이 마차’는 이명박 정부 탄생의 부정할 수 없는 공신이었지만, 권력을 두고서는 같은 편이 되질 못했다.
<7> 이상득 vs 이재오
개국공신 이상득(왼쪽)과 이재오는 권력을 두고서는 같은 편이 되질 못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는 17대 국회 후반, 18대 국회 전반을 양분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의 두 축이었다. 친이계의 덩치가 컸고, 힘도 훨씬 셌다. 하지만 2008년 18대 총선 이후 한 축에서 변이(?)가 일어난다. 친이계가 이상득계와 이재오계로 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해 9월,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퇴진 논쟁이 일면서 이재오계의 출현이 물 위로 드러났다. 홍 원내대표가 추석 전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려다 무산되자 당내에서 책임론이 일었다. 청와대는 “전쟁 중에 장수를 바꿀 수 없다”며 유임에 방점을 찍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권택기 김용태 정태근 진수희 의원이 홍 원내대표를 끌어내리는 데 앞장섰다. 우연인지 모두 이재오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이재오가 4월 총선 공천에 사사로이 개입했다는 죄목(?)으로 미국으로 가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연말로 예정된 이재오의 복귀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고, “지도부 힘 빼기는 이재오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번졌다.
‘홍준표 끌어내리기’는 다분히 이상득에 대한 도발적인 측면이 강했다. 당시 박희태 당 대표-홍준표 원내대표 체제는 이상득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오는 ‘안상수 대표-정의화 원내대표 체제’를 그렸지만 안·정은 별 이유 없이 중도에서 하차하게 된다. 힘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이재오가 미국에서 돌아온다 하더라도 박-홍 체제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이재오계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을 흔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추가경정예산 처리는 원내지도부 사퇴까지 거론할 죄목이 아니다.
이상득이 이재오를 괘씸해했던 것은 사사건건 야당이 ‘이상득 배후설’을 제기할 때, 아군으로 생각했던 세력이 야권과 힘을 합했기 때문이었다. 이상득계는 사실 당 주류 세력이었지만 충성도는 상당히 떨어졌다. 반대로 이재오계는 적극적이었다. 이상득은 ‘막후 실력자’였지만 이상득계에는 눈에 띄는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다.
이재오는 반대로 이상득이 참 미워보였을 것이다. 민주투사인 그가 박근혜를 어떻게 보는지 이상득이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상득계와 친박계는 보이지 않는 교감이 있었다. 사정기관이나 정보기관의 정보가 대부분 이상득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힘센 형님이 이재오가 그렇게 미워하는 박근혜와 같은 TK 지역구였고, 친박계도 이상득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10개월간의 귀양살이(?)를 끝낸 이재오는 2009년 3월 28일 귀국한다. ‘박연차 게이트’가 조금씩 여권의 권력 지형을 흔들 때였다. 이상득의 ‘형님 리더십’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2009년 5월, 결국 이상득은 이재오 세력에 발목이 잡힌다. 그가 정치권에서 두 발 짝 물러난 시발점이다. 원내대표 경선이 촉발제였다.
이재오계가 미는 안상수 의원이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후 중립 성향의 황우여 의원이 이상득계의 지원사격을 기대하며 출마를 선언했다. 친박계 최경환을 정책위의장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면서다.
당시 투표장을 들어가 보자. 최경환은 2차 결선 투표를 앞두고 단상에 나가 이런 말을 한다.
“1차 투표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제, 그제부터 ‘보이는 손’이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오더를 내리는 ‘보이는 손’은 잠시 외면하고 심사숙고 해 달라.”
이 말은 꽤 의미심장했다. 이 ‘보이는 손’은 안상수 후보자가 갑자기 등장한 ‘황-최’ 조에 대해 이상득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거론한 것을 받아친 말이었다. 원내대표 경선은 ‘보이는 손’인 이재오와 ‘보이지 않는 손’ 이상득의 싸움이 됐고, 이재오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2차 결선 투표에서 출석의원 159명 중 95표가 안-김성조 편을, 62표가 황-최 편을 들었다. 친이계 내부 권력 축이 이상득계에서 이재오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됐다.
그런데 웃긴 것은 경선이 있은 뒤다. 친박계가 맡을 것으로 봤던 사무총장 자리에 친이계 중에서 대표적인 이재오계로 꼽히는 장광근 의원이 맡게 됐고, 김성조 정책위의장 출마로 빈자리가 된 여의도연구소장에는 진수희 의원이 기용된다. 이재오계가 원내사령탑, 당의 조직과 살림을 총괄하는 사무총장, 전략과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싱크탱크까지 장악하면서 ‘이재오 친정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이상득계의 씨를 말리고 싹을 죽이겠다는 의도로 읽혔다.
이재오의 거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6월 2일, 권택기 김용태 임해규 정태근 조문환 차명진 등 초·재선 6명이 박희태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이 이재오 인맥으로 분류됐다. 마침 그날 이재오는 인터넷 포털 블로그에 미국 유학생활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선거에 패한 이들은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것이) 이재오였다.”
2011년 3월 안상수 대표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이상득 의원(왼쪽)과 이재오 특임장관이 악수를 나누는 모습. 일요신문 DB
이제 자신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상득을 겨누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원내대표 경선 이후 노무현 서거에 따른 조문 정국, 이후 당직 개편을 통해 권력 축을 바꾸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서일까. 이상득은 다음날인 6월 3일, ‘정치권 2선 후퇴’를 선언하게 된다.
“지금까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고자 철저히 노력해왔지만 앞으로는 당과 정무, 정치 현안에 관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처신하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통의 나날이었다. 정말 고통스럽다. 당 화합에 동참하되 저 자신은 지역구 일과 경제·자원·외교·안보 문제에만 전념하겠다.”
6월 4일, 이상득은 일본으로 떠나 2박 3일간 머물고서 포항에서 개항을 준비 중인 영일만 신항과 배후산업단지 현장을 둘러봤다. 아군이라 여겼던 동생(이재오)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이재오는 승승장구했다. 6월 10일, 6·10민주항쟁 주역으로서 그 의미를 되새긴다며 이재오는 태백산 새벽 산행에 나선다. 은평을 당협위원회 관계자들과 함께였다.
“정상에 오를 때는 정상이 보이지 않지만 올라야 한다. 일단 정상에 오르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려가야 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정상에 올랐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상득과 이재오의 대리전은 2011년 다시 한번 펼쳐지게 된다. 한나라당 5·6 원내대표 경선에서다. 사실 경선이 있기 며칠 전, 이상득과 이재오는 서울의 모처에서 만난다. 당시 원내대표 경선에는 이재오의 측근인 안경률 의원과 이상득계인 이병석 의원이 나선 상태였다. 박근혜계가 지원하는 황우여 의원도 나섰다. 사실 이 쌍이마차의 만남은 위기감의 발로에서였다. 18대 국회의 마지막 원내사령탑을 친박계에 넘겨줄 수 있다는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둘은 진지하게 이야기했고, 몇 차례 엇박자를 내더니 이런 합의안에 이른다.
“안경률과 이병석이 한 방에 들어가 단일화를 이룰 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다.”
이른바 교황 선출 방식인 콘클라베다. 하지만 안경률은 예선에서 자신이 이길 것을 자신했고, 이병석도 마찬가지였다. 이상득과 이재오의 만남을 비웃듯 둘은 각각 출마하고 3파전이 됐다. 여기서 웃긴 일이 펼쳐진다.
1차 투표에서 황우여-이주영 조가 64표를 얻었고, 안경률-진영 조가 58표, 이병석-박진 조가 33표를 거둔다. 과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에 황-이 조와 안-진 조가 2차 결선 투표에 나섰다. 결과는 황-이 조가 90표로 승리한 것이다. 떨어진 이-박 조가 안경률을 지지하면 이기는 선거였는데 이병석을 지지했던 세력이 안경률에게 가지 않고 황우여 조에게 쏠린 것이었다.
이재오는 이후 사석에서 “배신은 한 번으로 족하다”며 이상득을 향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오로선 이상득과의 독대가 ‘친이계의 원내대표 당선을 위해 서로 노력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깔린 것인데 이상득이 이를 뭉개버렸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후 이상득은 원내대표 경선에 대해 “개입한 적이 없다. 억측일 뿐”이라고 해명했고, 이재오도 “내가 배신감을 느낀 것은 SD(이상득)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고 비켜갔다.
이상득계와 이재오계의 생각은 사실 근본부터 달랐다. 이명박 대통령의 후임으로 이상득계는 ‘박근혜도 괜찮다’는 쪽이었고, 이재오계는 ‘박근혜만은 안 된다’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재오는 그간의 억측대로 직접 새누리당(한나라당 후신)의 대통령 경선 예비후보로 나선다. ‘박근혜만큼은 안 된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친이명박계의 몰락사다. 이후 이상득이 사석에서 이재오를 거론, “(자신이 15대 국회의 한나라당) 총무 때 이재오 컨트롤도 안 되고 질질 끌려 다녔다”고 말한 것이 기사화된다. 이상득은 “와전된 것”이라고 바로잡았는데, 이재오는 자신의 트위터에 “사람이 젊어서는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늙어서는 지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좀처럼 관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권력은 그런 것이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6인회의 운명
이상득과 이재오는 이명박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인 ‘6인회’의 멤버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전 이명박 대통령은 이들의 뜻을 줄곧 따랐고, 이들도 이명박 정부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살았다. 6인회는 이명박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이재오 김덕룡을 뜻한다.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등은 현재 감옥에 있거나 사면을 받은 상태다. 하지만 이들과 등을 돌린 것처럼 비치는 이재오는 살아남아 있다. 6인회는 이념을 매개로 한 가치집단이 아니었다. 동교동계나 상도동계 같은 동지적 유대감으로 뭉친 가신 그룹도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로 뭉쳤으니 큰 과제를 끝내고 동력을 잃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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