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프랑스. 난 세금 피해 떠난다.’
프랑스 부자들이 앞다퉈 ‘세금 망명’을 떠나고 있어 화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부유세’ 때문이다. 지난해 5월 집권한 사회당 정부가 연소득 100만 유로(약 14억 5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최고 75%의 세금을 부과하는 세제 개혁을 추진하자 앞다퉈 ‘집단 탈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증세’는 지난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으며, 당시 프랑스 유권자 가운데 5분의 3 이상이 지지하면서 그를 대선에서 승리하게 만든 핵심 요인이었다.
하지만 개혁안이 발표되자 예상했던 대로 보수 인사들과 부자들 사이에서 반발과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현재 45%인 세율을 갑자기 75%까지 폭발적으로 올리겠다는 것은 가혹하다는 입장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골만 깊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프랑스가 기업과 부자에 적대적이 될 경우 결국 프랑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우파 인사들은 “좌파 경제정책이 프랑스를 ‘유럽의 가난뱅이’로 만들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슈퍼 세금’ 정책을 밀어붙일 의사를 밝힌 올랑드 대통령이 과연 도망치듯 프랑스를 떠나고 있는 부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지, 그리고 앞으로 정계와 재계 사이의 줄다리기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전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프랑스 국민배우 드빠르디유
프랑스 국민배우인 제라르 드빠르디유(64)가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내뱉은 말이다. 지난달 4일 러시아로 귀화하면서 자랑스럽게 러시아 여권을 손에 들어보인 그는 “앞으로 러시아어도 열심히 배우고, 모스크바 외곽에 집도 장만해서 정착하겠다”면서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푸틴 총리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드빠르디유는 또한 공개서한을 통해 “나는 러시아를, 러시아 문학을, 그리고 푸틴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러시아는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다”라고 칭송했다. 사실 드빠르디유의 러시아 귀화는 그의 ‘국민배우’라는 상징성 때문에 프랑스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충격을 넘어 멘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러시아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다. 러시아 측은 드빠르디유의 귀화로 세계를 향해 ‘봐라! 이런 사람이 우리 국민이다!’라고 알리면서 앞으로 더 많은 유럽의 부자들의 대거 러시아로 이민 오길 내심 바라고 있다.
드빠르디유가 프랑스 국적을 포기한 이유는 스스로도 밝혔듯이 바로 ‘세금’ 때문이다. “프랑스 세금에 질렸다”고 말한 그는 이미 지난해부터 해외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목적지는 러시아가 아닌 벨기에였다. 즉, 벨기에 국적을 취득해 이중 국적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스 부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까닭에 ‘백만장자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국경의 작은 시골마을인 니샹에 주택을 구입했던 그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그에 대해 프랑스 정부 인사들의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마르크 애로 총리는 그를 가리켜 “참 한심하다”고 말했으며, 올랑드 대통령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윤리적으로 처신해야 한다”면서 비난했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드빠르디유는 당장 파리에 있는 저택을 내놓는 한편, 공개서한을 통해 “내 여권과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사회보장번호를 반납한다”며 국적 포기를 선언했다. 또한 그는 “세금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부자들이 나처럼 모욕을 당하진 않았다”면서 불쾌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벨기에 국민이 되지는 못했다. ‘단순히 세금 도피가 목적일 경우에는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벨기에 정부의 까다로운 입장 때문이었다. 망명이 어려워질 듯하자 그는 부랴부랴 방향을 틀어 러시아로 망명했으며, 그렇게 러시아 국민이 됐다.
아르노 루이뷔통 회장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9월 그가 벨기에 국적을 신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현재 그의 국적 변경은 심사가 진행 중인 상태. 이에 대해 좌파 신문인 <리베라시옹>은 “꺼져! 이 부자 머저리야!”라는 커버스토리를 통해 “그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나라를 잊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아르노 회장은 모두 터무니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면서 “나는 앞으로도 프랑스 시민권을 유지하면서 세금도 착실히 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LVMH의 지주회사인 ‘그룹 아르노’의 지분 31%를 벨기에의 ‘필인베스트’사로 옮긴 데 대해서도 부자 증세 때문에 재산을 빼돌린 게 아니라 “가족 상속 문제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그의 진의는 계속 의심받고 있다. 브뤼셀 인근의 작은 도시인 우클의 아르망 드데커 시장은 “아르노 회장은 이미 이곳으로 이사를 온 상태다. 그는 프랑스 세금 정책에 매우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최종 목적지가 사실은 모나코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벨기에를 거쳐 모나코로 이주할 경우, 즉 ‘국적 세탁’을 할 경우에는 세금이 완전 면제되기 때문이다. 벨기에 국적자들은 모나코에서 세금이 면제되는 반면 프랑스 국적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런던으로 ‘세금 망명’을 떠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올랑드 정권 이후 가장 먼저 프랑스를 떠난 부호들 가운데 한 명인 안경유통체인업체 ‘알랭아플루’ 회장의 경우에도 영국을 택했다. 현재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프랑스를 떠난 이유가 단순히 세금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반부호 정서가 더 컸다고 말하는 그는 “프랑스는 부자와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참호전을 벌이는 것 같다. 마치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로 돌아간 것 같다”고 질책했다.
사실 프랑스인들의 ‘세금 망명’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가령 2001년에는 384명의 부자들이 프랑스를 떠났고, 2011년에는 717명으로 늘었다(단, 이렇게 떠난 사람들 가운데 30~40%는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추세는 올랑드 정부의 ‘슈퍼 세금’ 정책이 본격화될 올해부터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해 5월 이후 벨기에 국적을 신청한 프랑스인들은 전년 대비 두 배 늘어났다.
이로 인해 파리의 부동산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리의 부자들이 빠져나가면서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파리의 한 부동산중개인은 “지난 5월 이후 시가 100만 유로(약 15억 원) 이상의 주택들이 400~500채가량 무더기로 매물로 나왔다”고 말했다. 또한 영국의 부동산중개업소인 ‘소더비’ 프랑스 지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4~6월 사이에 170만 유로(약 25억 원) 이상의 부동산이 100채 넘게 나왔다. 2011년 같은 기간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난 수치다”라고 말했다.
사실 부자증세는 비단 프랑스만 내세우고 있는 조세정책은 아니다. 미국이나 그리스, 포르투갈,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증세로 전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각국이 이처럼 증세로 돌아선 이유는 심각한 재정적자 때문이다. 지난 수년 간 지속적으로 감세 정책을 추진해온 데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대적인 감세를 실시한 탓에 말 그대로 곳간이 텅텅 비어버린 것이다. 미국,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은 GDP 대비 국가부채가 이미 100%를 넘겼고, 일본의 경우에는 230%까지 치솟았다.
사정이 이러니 너도 나도 증세 카드를 빼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 미국의 경우에는 ‘버핏세’라고도 불리는 부자 증세 정책에 따라 지난 1월 1일부터 연소득 40만 달러(약 4억 3000만 원) 이상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소득세 최고세율을 35%에서 39.6%로 올린 상태다. 야당인 공화당까지 나서서 정부의 세율 인상에 합의한 걸 보면 미 정부의 재정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다.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한 그리스의 경우에는 연소득 2만 6000유로(약 3800만 원) 이상에게는 최고 22%, 4만 유로(약 59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에게는 42%의 세율을 적용하는 한편, 부동산 보유세 및 법인세를 인상할 계획이다. 포르투갈은 올해 초 최고 소득세율을 46.5%에서 48%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보수파인 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선 일본은 연소득 1800만 엔(약 2억 원) 이상의 고소득자들을 대상으로 소득세율을 40%에서 45%로 인상할지 여부를 두고 고민 중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를 비교해봐도 프랑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75%의 세율은 높은 것이 사실. 현재 이 부유세 정책은 지난해말 헌법재판소가 세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잠시 제동이 걸린 상태다. 위헌 판결을 받은 부분은 적용 대상이 ‘가구’가 아닌 ‘개인’이라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 세법상 소득세는 개인이 아닌 가구를 기준으로 부과되는데 이번에 추진한 부유세는 개인에게 부과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부부가 90만 유로를 버는 가구는 부유세를 내지 않지만, 100만 유로를 버는 사람이 한 명만 있는 가구는 부유세를 내야 한다.
이런 허술한 법안에 대해 여야 안팎에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증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섣불리 증세를 할 경우 투자가 줄고 기업 활동이 위축되는 한편, 부자들의 집단탈출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프랑스경제인연합회의 로렌스 파리소 회장은 “많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프랑스를 피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10년 전에는 독일이 ‘유럽의 가난뱅이’였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가 그 타이틀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법안을 수정해서라도 올해 안에 부유세 정책을 재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르나르 카즈뇌브 유럽담당장관은 “부자들의 집단탈출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 기업가들은 애국자들이다”라고 낙관하고 있다. 또한 그는 “프랑스에는 기업에 유리한, 그리고 투자를 지지하는 법률조항도 많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프랑스는 기업에 친화적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 역시 올랑드 정부의 편을 들고 나섰다. 올랑드 정부의 75% 세율을 지지한다고 밝힌 그는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건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지단은 스페인에 거주하고 있는 상태. 이에 대해서 그는 “그렇다고 내가 세금천국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스페인에서 높은 세금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올랑드 정부가 증세안을 철회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점치고 있지만 대선 핵심 공약이었던 만큼 그가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세금 천국은 어디 “프랑스 부자들에 레드카펫” 영국 총리 러브콜 오래 전부터 ‘부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스위스는 지난 150년 동안 해외 부자들에게 세금우대조치를 실시해왔다. 자국의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서 외국에서 이주해오는 부자들에게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세제 혜택을 받은 외국인 부호들은 5000명가량이다. 이 가운데는 각각 1999년과 1976년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과 프랑스 국민가수 겸 배우인 샤를 아즈나부르도 있다. 세계적인 프랑스의 카레이서인 세바스티앵 로에브는 당당하게 “세금을 피해서 떠난다”고 말하면서 200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프랑스 록스타 자니 할리데이는 벨기에 시민권 신청이 거부당하자 지난 2006년 결국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밖에 스위스로 이주한 유명인들로는 배우 이자벨 아자니, 프랑스 테니스 전 세계챔피언인 아멜리에 모레스모, 현 테니스 랭킹 세계 8위인 조 윌프리드 총가, 세계 10위인 리샤르 가스케 등이 있다. 미국의 유명 팝가수인 티나 터너 역시 얼마 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겠다고 발표해서 화제가 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미 취리히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터너는 “나는 스위스에서 너무 행복하다. 이곳이 마치 고향처럼 느껴진다”며 애정을 나타냈다. 세금 망명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오히려 스위스 세율이 더 높다”고 말하면서 일축했다. ▲벨기에 소득세율은 최고 53.7%로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부유세가 별도로 없기 때문에 유럽 부자들에게 인기 있는 망명국이다. 상속세 또한 3%로 낮은 수준이다. 국경이 인접한 데다 같은 불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히 프랑스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현재 벨기에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20만 명가량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올랑드 정부가 들어선 지난해 벨기에 국적 신청자는 전년 대비 두 배 늘어난 126명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시민권을 취득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자격 조건은 벨기에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자, 그리고 벨기에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보여주는 자에 한한다. 프랑스 슈퍼마켓 체인 ‘오샹’의 창업주인 뮐리에 가족은 프랑스 세금을 피해 현재 벨기에로 이주한 상태다. ▲영국 영국의 소득세율은 최고 50%.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해 6월, 멕시코에서 열린 비즈니스서밋(B20)에서 “영국으로 오는 프랑스 기업가들을 레드카펫을 깔고 환영하겠다”고 말해 프랑스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캐머런 총리의 이 발언 이후 프랑스 부자들의 영국행 러시 움직임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고연봉 금융직 알선을 전문으로 하는 인력회사인 ‘애츠배리 마틴’은 “영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프랑스인들이 51% 늘었다”고 말했으며, 웹사이트 ‘토탈잡스닷컴’은 “프랑스 노동자의 42%가 영국으로 이주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