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서울시장과 악수하는 모습.
이명박으로선, 노무현의 존재는 실보다 득이 컸다. 이명박이 박근혜를 물리치고 한나라당 대선 주자가 된 것도 노무현의 실책이 워낙 컸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노의 실정’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었다. 세간에서 자주 이런 말이 들렸다. ‘기득권 던지기’로 위기 때마다 승부수를 던졌던 노무현은 평검사와 대화하고, 임기 중 물러날 수 있다며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야권과의 대연정까지 추진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파격은 잦았고 식상해져갔다.
2006년 5·31 지방선거를 보자. 2007년 대선이 있기 한 해 전이니 참여정부의 ‘중후반 평가’로 볼 수 있었다. 서울 구청장 25 대 0, 서울시의원 96 대 0, 경기도의원 108 대 0, 인천시의원 30 대 0…야당인 한나라당이 싹쓸이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낭패감을 금치 못했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이만하면 정권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까지 나왔다.
서울시장 재임 때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며 타 종교계의 공분을 산 이명박은 ‘황제 테니스’ 논란으로 타락한 귀족 이미지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국민은 노무현을 향해 더 분노했다. 당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말은 유행어였다. 아파트값 폭등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정책 실패, 6자회담에서 배제되는 불안한 외교력,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느슨하고 무기력한 대응….
도덕적 하자보다는 ‘경제를 살릴 것 같은’ 건설 CEO 출신 이명박은 여러 매체에서 ‘부동산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것 같다’는 이유로 대권 후보 지지도 1위 자리를 탈환하게 된다. 고건 전 총리의 인기는 ‘고결한 인품만으로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비판론이 일면서 사그라진다. 그런 분위기가 쏠림 투표로 나타난 것이 그해 지방선거였다. 그리고 그 파괴력에 정치권이 놀란다. 놀람에는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었다. 유권자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돌아설지 알 수 없게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명박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는 2006년 더 커지게 된다. 바로 ‘노무현-이명박 연대설’이다. 2007년 대선 막판까지 쉬이 꺼지지 않았던 이유를 살펴보자.
사실 노무현이 ‘킹메이커’가 돼 정권 재창출을 이루기 위해선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가 모두 출전해야 했다. 보수표가 갈라지고 영남권이 쪼개지는 것. 거기에다 열린우리당이 영남권 출신 후보를 내면 ‘필승’이었다.
2006년 8월 6일.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오찬 회동을 한 자리에서 노무현은 이런 말을 한다.
“당을 잘 유지하면 좋은 선장이 승선할 수도 있다.”
기존 후보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해석이 나왔고, 좋은 선장을 영입(?)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했다. 당시 친노그룹에서는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당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하자는 명분도 분명했다. 필승 인물을 찾겠다는 것이었으니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이명박이 적임자였다.
그러면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이 모처에서 만나 교감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노무현의 오른팔 안희정과 이명박의 오른팔 박영준이 나섰다는 설이었다. 둘은 부인했고, 진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노 연대설이 자꾸만 회자된 것은 이명박과 노무현의 닮은 성격과 유사한 성장 배경도 한몫했다.
당시 이명박은 한나라당 주자 중 이념적 스펙트럼이 가장 넓었다. 운동권 출신이었고, 정치와 행정 경력은 짧았다. 이명박은 그 스스로 “주택이나 교통정책에 있어서는 나는 좌파”라는 말도 했다. 이명박은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문제에 대해 사활을 걸고 반대한 박근혜와는 분명히 달랐다. 실사구시적 성격까지. 노무현은 답답했을 것이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김근태 두 예비후보의 지지율은 5%대를 넘지 못했다. 천정배 유시민 김혁규 김두관 등 친노 직계의 인기는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의 정치경력을 들여다보면 상식을 깨는 도전과 모험이 많았다. 그는 ‘정치적 상상력’이 방대한 사람이었다.
2006년 7월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명박은 이재오를 밀었고, 박근혜는 강재섭을 민다. 강재섭이 당대표가 된다. “이대로 가면 이후 당내 대권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이명박을 음습해 온다. 대중적 지지도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접전이었지만, 당내 세력구도에서는 박근혜가 분명히 우위였던 것이다.
노무현으로선 이명박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기회였을 수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분열을 꾀할 적기. 대선 후보를 뽑는 한나라당 전당대회가 박근혜 옹립 분위기로 가면 이명박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이명박의 탈당설은 2007년 대선의 주요 변수 중 가장 파괴력이 큰 것이었다. ‘이명박 탈당→신당 창당’+‘열린우리당 반노세력과 호남계 의원 탈당→친노 주축의 열우당’은 황당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박근혜의 한나라당, 고건과 열린우리당 탈당파, 이명박과 열린우리당 3파전 구도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07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맞이한 후 나란히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치적 음모 아니냐? 나는 조직 생활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항상 질서의 규칙을 지켜왔다. 그런데도 자꾸 그런 얘기가 들리는 걸 보면 바깥에 분열을 좋아하는 세력이 있고, 안에도 그런 세력이 있는지 모른다.”
‘이-노 연대설’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지만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이명박이 정해진 뒤에도 노무현은 이상하리만큼 한나라당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간다. 노무현의 실책과 무능이 부각될수록 이명박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대선 본선에서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그해 9월이다. 집권 여당의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었지만 대선 본선의 대결 프레임은 이미 ‘이명박 대 노무현’ 구도로 일찌감치 자리한다. 노무현이 킹메이커를 자처할수록 여당의 발이 꼬이는 것이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이번 대선은 노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의 대결이다”라고 논평하며 ‘이-노’ 대결구도를 짠다.
그런데 노무현의 청와대가 그달 7일 이명박 대선 후보와 이재오 박계동 안상수 등 4명을 ‘청와대 정치공작설’ 등 허위 사실을 주장해 대통령 보좌진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해버린다. 대선을 석 달 앞두고 청와대가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를 직접 고소한 전대미문의 사건. 곧바로 청와대의 “대선 개입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 시작한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 명의로 낸 ‘이명박 후보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통령 비서실의 입장’이란 글을 보자.
“한나라당은 최소한의 단서와 근거도 없이 청와대가 배후에서 정치 공작을 하고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이명박 후보 본인까지 나서서 정권 차원의 정치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도덕성 검증 요구와 불법 의혹을 물타기 하려는 선거용 술수다. 대통령 비서실은 국가 기관에 대한 부당한 정치 공세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노무현을 자극(?)해 이 같은 결과를 끌어낸 것은 한나라당이었다. 9월 4일 한나라당 측 관계자가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
“국정원과 국세청이 이명박 후보의 재산 내역을 들여다본 의혹이 있으니 6일 오전 11시에 조사하러 가겠다.”
정도가 지나치다고 여긴 청와대는 발끈했다. 하지만 그해 6월, 노무현이 이명박의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비난해 두 차례 중앙선관위로부터 선거 중립 의무 위반 경고를 받은 터여서 ‘청와대의 대선 개입’이라는 불씨는 꺼지지 않은 터였다.
타이밍을 잡은 이명박 측은 곧바로 “청와대가 선거 중립 의무를 지키기보다 대선에 적극 개입해 정권 연장을 기도하고 있다” “정윤재 신정아 사건이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물타기 의도다” “정국 자체를 노무현 대 이명박 구도로 가져가 친노 주자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친노 주자들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다”는 등 고소 배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한다.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 대한 언론의 주목도는 계속 떨어진다.
일각에서는 이명박과 노무현의 ‘빅딜설’도 나왔다. 청와대가 당선이 유력한 이명박으로부터 노무현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삼성 비자금 특검을 양해 받고, 대신 BBK 수사를 봐주자는 모종의 협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삼성 특검이 이뤄지면 유·무죄를 떠나 노무현 측근이 줄줄이 소환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당시 검찰이 이명박의 아킬레스건인 BBK 사건 수사 발표에서 이명박의 혐의 없음을 인정한 것도 노무현의 작품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기서 언론인
이명박의 대권 도전에-인정하든 하지 않든-도움을 줬던 노무현. 하지만 이명박의 새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서서히 노무현 주위를 포위하며 압박에 들어간다. 다음 호에서 짚어본다. |
잠깐! - 정치는 상상력? 2007년 대선 정국에 정치권에는 4가지 시나리오가 돌았다. 1. ‘고건 대세론’: 박원순 변호사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이 야권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지만 고사하면서 시작됐다. 노무현도 싫고 한나라당도 싫으면 ‘나에게 오라’. 지난 ‘안철수 현상’과 비슷했다. 2. ‘박근혜-DJ 연대설’: 뿌리 깊은 동서갈등을 푸는 계기가 된다. 박정희 정부 때 핍박받았던 DJ가 박정희의 딸과 손잡으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산업화 브랜드와 민주화 브랜드의 결합. 3. ‘손학규-고건 연대설’: 둘은 경기고와 서울대 동창이다. 이념적으로는 중도. 둘이 합치면 안정적인 행정이 도모된다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다. 여기에 ‘이명박-노무현 연대설’까지. 하지만, 상상력은 현실이 되진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