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백악실에서 이명박 당선인과 만찬을 겸한 회동을 갖고 정권 인수문제를 비롯한 국정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선을 이틀 앞둔 2007년 12월 17일 오후 3시. 당시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이 발의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 혐의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즉,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렇게 ‘이명박-노무현 전면전’은 예견돼 있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측은 “이명박과 관련한 BBK, LK-e뱅크, 옵셔널벤처스 등에 대한 수사결과를 검찰이 발표했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며 “검찰이 의도적으로 편파 수사나 조작을 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고 발의 배경을 밝힌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이 거부권을 행사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기대로 그치고 만다.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법적인 논쟁을 떠나, 대선에 이기든 지든 정치적 보복성이 다분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이명박이 당선이 된다는 가정 하에 차기 대통령을 인수위 가동 기간에 법정에 세운다는 것. 대권 바통을 넘겨받기 전이었지만 당선이 유력시되던 이명박으로선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을 대목이다.
2008년 1월 24일이었다. 노무현은 울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도식’에 영상 메시지를 보낸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지난날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과 유가족 여러분께 국가를 대신해 다시 한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직 대통령이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한 과거사 대국민 사과였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이명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소 삐딱했다. 대통령직 인수위는 그달 이미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폐지하거나 대폭적으로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인수위가 당시 ‘점령군’으로 회자한 것도 여야가 합의해 만든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리하겠다며 밀어붙였던 까닭도 있었다. 노무현의 사과 발언이 있기 사흘 전인 21일, 한나라당은 9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진실화해위원회’ 하나로 통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내놨다. 제주 4·3사건, 노근리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광주 5·18 관련 사건, 민주화 보상 및 명예 회복 등에 관한 위원회를 모두 폐지하고, 진실화해위 하나로 통폐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명박과 노무현의 불편함은 알려진 것보다 심각했다. “노무현이 했던 것은 무조건 안 돼”라는 식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명박의 인수위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정부부서의 정책평가서를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노무현은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서 “지난 5년 정책에 대해서 평가서를 내라는데 반성문 써오라 이 말 아닙니까?”라고 정면으로 반박한다. 마치 선생이 학생에게 반성문 쓰라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격이었다.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넘어가는 정권 인수인계 과정은 이렇듯 어렵고 힘들었다. 그만큼 국민은 불안했다. 무엇보다 헌법에 대통령과 당선인의 관계를 규정한 조항이 없었다.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몰랐다. 기타 법률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법적 조항이 없으니 협력보다는 갈등관계가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는 대통령이지만 당선인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었고, 당선인도 취임 전이긴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어렵게 할 수 있었다. 노무현이 “통일부를 존속시키고 임명직 임기를 채워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명박은 답하지 않았다.
만찬장으로 이동하기 전 악수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를 지켜 본 이명박은 나았을까. 이명박은 강남 재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는다. 경기권에 신도시를 추가로 만들겠다고도 한다. 재건축 완화를 통해 강남 중산층들의 마음을 잡고, 신도시 건설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방에서 폭발했다. 경기를 반짝 살리려다 장기적인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거셌다. 아파트 가격 상승은 오히려 소비 심리 위축이란 결과를 가져왔다. 반대를 위한 반대, 차별화를 위한 차별화만 꾀한 결과였다.
전방위에 걸친 고강도 수사로 전 정권의 먼지를 털겠다는 이명박의 검찰은 노무현 정부의 실세들을 투망을 던져 건져 올리는 식으로 건드리기 시작한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서울지검 특수부 등 검찰이 총출동하면서 공기업 비리 수사에 나선 것이었다. 감사원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관계 기관도 총동원됐다. 중수부가 석유공사와 강원랜드를 털었고, 서울중앙지검은 KT와 KTF 비리 수사, 신성해운 세무조사 로비, 그랜드코리아레저 비리, 부산자원 특혜대출 수사에 나섰으며, 서울 서부지검은 프라임그룹 비자금 수사에 집중했다. 서울 남부지검은 애경그룹을 팠고, 대전지검은 VK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실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까지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영장이 기각되거나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많았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그해 국감장에서 “전 정권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차례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국민은 현재 검찰 기업수사를 편파 보복 수사라 생각한다”고 비판했는데 검찰 내부에서도 검찰 수사가 정치적이라는 비판에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는 불만 섞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은 그 정도로 전 정권에 분노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 ‘청와대 자료유출 논란’이 제기되면서 ‘이-노’가 이번에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노무현이 자신의 재임기간 중 청와대에서 만들어진 각종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옮겼다는 의혹이 일면서 검찰 수사로 이어진 것이다.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도 민감한 내부 자료들을 파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차기 정권을 방해하려던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노무현이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민정, 인사 등 민감한 부서의 자료에서부터 청와대 전산시스템인 이지원(e知園) 파일, 컴퓨터 하드디스크까지 모두 파기했다는 논란은 분명 이명박을 화나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대립하던 현-전 정권 일인자는 결국 노무현의 친형 노건평의 이름이 나오면서 이명박의 우세로 기울게 된다.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는 데 건평 씨가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풀 죽었던 이명박의 표정에 화색이 돈다. 세종캐피탈은 부실한 세종증권을 팔아야 했는데 세종캐피탈 측이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을 상대로 한 로비에 실패하자, 정대근과 친분이 있는 건평 씨를 소개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2005년 4월, 홍기옥 세종캐피탈 대표로부터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도와 달라’는 청탁을 받은 노무현의 고교 동창 정화삼 씨와 동생 정광용 씨는 그해 6월 노건평 씨를 찾아갔다고 밝힌다.
노 씨는 2008년 이런 사실에 대해 “2005년 5, 6월쯤 정화삼 씨가 전화를 세 번쯤 했다. 정광용 씨가 봉하에 찾아와서 커피도 한잔 했다. 그후 세종캐피탈 홍기옥 사장을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에게 소개해달라고 해 소개해줬다. 이것이 잘못됐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단돈 10원짜리 하나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2006년 1월 농협은 세종증권을 1039억 원에 인수한다. 세종증권 측은 증권사를 인수한 정대근 전 농협회장에게 50억 원을 줬고, 정화삼 씨 형제는 홍기옥 대표로부터 29억 6000만 원을 받게 된다. 이 중 건평 씨의 몫이 있는가에 검찰이 수사를 집중하게 되고, 경남 김해시 내동 상가가 건평 씨의 몫일 것이란 이야기가 언론에 자꾸 흘러나오게 된다. 검찰 수사가 경마식으로 보도되면서 노무현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박연차 게이트’가 터지면서 노무현을 상대로 한 수사로 번진다. 노무현 자살정국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1] 노건평을 막지 못한 이유 노무현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막기 위해 900여 명의 리스트를 집중적으로 관리해 왔다. 그 중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친인척은 따로 분류해 관리할 정도로 엄격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무현의 친조카인 노지원이 성인오락실 ‘바다이야기’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일면서 집중 관리의 강도는 더욱 세진다. 하지만 요주의 인물은 바로 노건평 씨였다. 너무 순박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에 더 노출됐던 사람이었고 실제로 봉하마을 동향을 면밀히 파악했지만 노건평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2]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은 1948년 이승만 정부가 과거 일제하에서 좌익계 독립운동을 했거나, 광복 뒤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와 그 가족 지인 등을 ‘사상 개조’ 명분으로 가입시켰던 단체다. 하지만 한국전쟁 초기 이들은 후퇴하던 군과 경찰에 끌려가 집단 학살당했다. 수십만 명이 죽었다. 이후 피해 유족에게는 연좌제가 씌워졌다. 오랜 기간 감시당했고, 사찰의 대상이 된다.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하면서 피해를 입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