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4일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매각 비리 의혹과 관련해 영장 실질심사를 받고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 대한 ‘이명박의 검찰’은 전 정권의 심장을 겨누기 시작한다. 박연차는 어찌 보면 판도라의 상자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박 회장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고, 검찰은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박연차와 노무현의 친형인 노건평은 절친이었고, 노무현 정부 인사들도 크고 작게 얽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검찰은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제기되던 각종 의혹에 대해 칼을 겨눈다. 박연차와 관련해선 2008년 5월부터 축적된 자료들을 들춰보기 시작한다. 국세청도 가세한다. 7월부터는 박연차가 운영하는 신발 제조회사인 태광실업과 골프장을 운영하는 정산개발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정도가 심했다. 경남 김해에 있는 이들 회사에 ‘국세청의 중앙수사부’라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직접 나섰던 것이다. 국세청은 10월 말까지였던 조사 기한을 12월 5일까지 연장하면서 조사에 몰두한다. 그러다 검찰 수사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자 11월 21일 박연차를 검찰에 고발했다. 박연차가 해외에 유령 회사를 세워 거래하는 과정에서 200억 원대의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고발의 이유였다. 박연차에 대한 압박은 임채진 검찰총장과 한상률 국세청장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노무현이 임명했던 인물들이었지만, 어떻게든 이명박 정부에서도 입맛에 맡는 선물을 내놔야 했던 것이다.
검찰은 그해 11월 18일 세종증권을 압수 수색했고, 사흘 뒤인 21일에는 정화삼 씨와 동생을 체포하면서 일사천리로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면서 여권 내부에서 은밀하게 통용되던 ‘로열 패밀리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묵계가 깨져버린다.
검찰의 수사가 노건평의 목을 죄어오자 노건평은 11월 24일 자택을 떠나 잠행한다. 멀리 있는 것처럼 했지만 봉하마을 인근의 지인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27일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만취해 자해소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뜬소문이었다. 언론의 ‘카더라’식 보도는 계속된다. 노무현은 자신이 집권 때 취재선진화라며 언론의 입을 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분을 삭힌 언론은 한번 맛 좀 봐란 식으로 노무현의 멱살을 잡는다. 검찰이 수사내용을 조금씩 흘리면서 검-언 유착 이야기가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을 앞두고 대검찰청 입구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 일요신문 DB
하지만 일각에서는 노무현만큼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란 예측도 제기됐다. 사실 대선 정국에서 이명박은 구설의 한복판에 있었다. 허위 재산신고 등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에다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 특혜 분양 의혹, 서울 도곡동 땅 및 다스 지분과 관련된 공직자윤리법 위반 의혹, BBK 김경준 대표와 함께 주가를 조작한 의혹, 자녀들의 위장전입 및 위장취업, 두 자녀 기부입학 의혹 등등 의혹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구설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당시 노무현의 검찰이 이명박의 BBK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집권 이후 노무현의 로열패밀리는 건드리지 말라는 모종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검찰이 2007년 12월 초 BBK 주가 조작, BBK 차명 소유, (주)다스 차명 소유 등 BBK 3대 의혹에 대해 이명박 후보는 혐의가 없다고 발표하면서 이런 이야기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대선 승부는 사실 이때 끝났고, 그 혁혁한 공을 노무현이 세웠다는 것이다.
그해 11월 26일, 노건평이 한 언론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이때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되더라”라고 말한다. 이 말이 와전돼 노건평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검·경에 퍼졌고, 자살 시도 장소가 부산의 모 호텔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부산지방경찰청은 경찰병력을 부산 시내 모든 호텔에 투입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전모는 밝혀졌다. 세종증권 대주주인 세종캐피털 홍기욱 사장과 노무현의 오랜 친구인 정화삼 씨가 노건평에게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해 줄 것을 청탁했고, 노건평은 친분이 두터운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세종증권 인수를 부탁했다. 2006년 1월 인수계약이 체결되자 홍 사장은 자신 명의의 통장에 29억여 원을 넣어 도장과 함께 정화삼 씨에게 줬다. 이 돈이 청탁 사례라고 검찰은 밝혔다. 노건평은 4억 정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 박연차는 2005년 노건평이 정대근 당시 회장에게 세종증권 인수 청탁을 하자 세종증권 197만 주를 샀고, 12월 농협이 세종증권 인수 양해각서를 체결하기 전 주식을 팔아 178억 원의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2009년 4월 30일 검찰 소환길에 오른 노 전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짤막하게 답한 뒤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일요신문 DB
이명박은 촛불로 정국이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대반격에 나섰는데 MBC PD수첩팀을 검찰에 고발하고, 민정수석실을 중심으로 촛불 주도 세력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면서 세력 검거에 나섰던 것이다. 이명박의 눈치만 살폈던 사정 기관은 알아서 기었다. 시민단체들에 대한 고립화 작전을 가동했다. 시민단체들에 대한 기업의 후원 내역을 조사하면서 노무현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명박의 노무현 죽이기는 그가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도덕성’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원치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노무현의 가족 비리는 진보세력이 집권해도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노무현 스스로도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이라는 비판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2009년 4월 30일. 노무현은 퇴임 후 1년 2개월 만에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소환된다. 박연차로부터 ‘포괄적 뇌물’을 받은 혐의였다.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는 헌정 사상 세 번째였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이후 14년 만이기도 했다. 노무현은 2007년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받은 박연차의 돈 100만 달러에 대해 빚을 갚고 자녀 유학자금과 생활비 등으로 인한 채무를 갚는 데 집사람이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
노건평과 박연차의 구속으로 일단락돼 보였던 수사는 2009년 3월부터 다시 속도를 낸 것이다. 3월 23일 1억 원 수수 혐의로 노무현의 후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붙잡혔다. 3일 뒤에는 ‘오른팔’ 이광재가 구속된다. 4월 7일에는 집사이자 친구인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체포된다. 노무현의 조카사위 연철호가 체포되고, 그 이튿날 부인 권양숙 씨가 부산지검으로 가야 했다. 아들 노건호가 소환되고 처남 권기문과 딸 노정연도 검찰에 불려간다.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도 횡령 혐의로 대전지검에 구속된다.
5월 23일 노무현은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유서를 남기고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을 선택하게 할 만큼 무리하게 수사한 검찰의 뒤에는 청와대가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을 구체적인 물증도 없이 혐의만 갖고 모욕과 창피를 주기 위해 여론재판을 했다는 비난도 거세졌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서거 직후 “노 전 대통령께서 갑작스레 서거하시게 된 점에 대해 충격과 비탄을 금할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종료할 것”이라는 긴급 성명을 발표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서거는 이명박 정부도 청렴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켜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말기에서 보듯 그러지 못했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포괄적 뇌물수수죄란 노무현의 혐의에 대해 검찰은 ‘포괄적 뇌물수수죄’를 말한다. 포괄적 뇌물죄는 법전에 적시돼 있지 않은 죄명이지만, 뇌물죄의 요소인 대가성에 있어서 대법원이 구체적인 집행행위와 대가관계가 없어도 포괄적인 관계가 있으면 족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나온 죄명.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된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인터넷 상에서는 ‘포괄적 ○○죄’라는 패러디가 잇따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