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을 받는 김대중 대통령. 이 때를 전후해 DJ는 종종 말실수를 하곤 했다. 여권 내부에 선 대선주자까지 가세해 권력투쟁이 더 심해지면서 ‘내정’ 은 엉망으로 치달았다. | ||
이날 대구를 방문한 김 대통령은 지역유지 등과의 만찬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것이다. 그러면 서울로 곧바로 와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클린턴의 방북 자체가 불투명했다. 설령 이뤄진다 해도 우방국 정상의 외교일정을 미리 언급하는 것은 큰 결례였다.
박 대변인은 청와대 기자단의 협조를 요청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만약에 평양을 갈 경우 3국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수준으로 기사 내용을 조정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해 박 대변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2000년 12월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DJ는 그 시기를 전후로 일종의 ‘과잉 의욕’을 보였다. 이로 인해 말실수가 종종 빚어졌다. 평생 숙원이었던 노벨상 수상을 이뤄낸 심정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측면도 많다. 문제는 이 즈음이 집권 중반기를 넘긴 시점이었다는 점이다.
여권 내부도 분열이 심한 상태였다. 권노갑 한화갑 최고위원 간의 ‘양갑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권 위원의 인사전횡 및 비리 의혹 등이 민주당 내 소장파에 의해 최대 이슈로 부각됐다. 소장파와 야당이 ‘한통속’이 돼서 부르짖는 국정쇄신론이 민심의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었다. 공동여당인 자민련조차 “김 대통령이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말고 국정을 추슬러야 한다”는 논평을 낼 정도였다.
DJ로서는 심한 배신감을 느낄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치적인 남북관계 진척을 과장하려는 경향도 심해졌다. 그 해 11월2일 부산지역 기관장 등과의 만찬에서는 “일본과 수교가 잘돼서 (북한이) 1백억달러에 이르는 돈도 받을 수 있다. 일본이 1백억달러를 지불할 것이다. 북한은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할 것이고 우리 건설업자가 일을 많이 할 것이다. 임기 동안 이런 기반을 닦고 다음 후계자가 받아 발전시켜 민족에 영광을 주는 시대를 맞도록 여러분과 노력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고 통치권자의 이 같은 언급은 당연히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오히려 불끄기에 나섰다. 당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큰 의미를 둘 필요 없다. 김 대통령은 일본 신문이 여러 차례 보도한 액수를 인용해 언급한 것이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 일본정부로부터 공식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 일반론을 말한 것이다”고 해명했다. 대통령이 해외 신문의 추측성 보도를 그 소스를 거론하지 않은 채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말한 것이다.
DJ 본인이 들떠 있었던 탓일까. 공교롭게도 청와대 경호실도 실수를 저질렀다.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중이던 당시 김 대통령이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해프닝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슬로 그랜드호텔 6층에 투숙해 있던 김 대통령이 12월9일 시상식 예행연습에 참석하기 위해 타고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던 것. 김 대통령은 그 속에 몇 분간 갇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엘리베이터 고장이 불가항력이었다고 쳐도 경호실의 위기대처능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은 면키 어려웠다.
DJ의 불안한 행보로 인해 일각에서는 ‘건강이상설’까지 흘러나왔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평소 스타일로 봐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물리적 건강은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노벨상 수상으로 부담이 심해진 것 같다. ‘노벨상을 받았으니 더 잘해야지’라고 말하신다. 비서실이 일정을 줄여야 한다고 조언해도 잘 안된다. 지방순회도 반대했으나 강행하고 있다. 업무보고 일정을 최소화하고 현장 민심 청취를 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두 가지를 함께 하고 있다.”
DJ가 악전고투했던 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우선 ‘정보 부족’이 큰 구멍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국정원의 ‘내치 관련 보고’가 부실했다.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은 대북 관계 전문가였다.
임 원장은 내치에 관해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김은성 2차장이 장악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더욱이 김 차장은 순수한 ‘정보맨’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열린금고 불법 대출사건의 주역인 진승현씨와 ‘거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권 내부의 파워게임에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은 국정원 재직 당시 국 내파트를 장악, 청와대 보고서를 작성했다. 물 론 자신에 대한 부분이 들어갔을 리 만무. | ||
이를 간파한 권 위원은 임 원장에게 강력 항의했고 이후 김 차장을 불신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김 차장이 주도했던 내치 관련 정보가 상당부분 왜곡됐을 가능성도 농후한 셈이다.
진승현 게이트 등에 김 차장 본인이 발을 담갔다거나 민주당 일부 실세가 무관치 않다는 의혹 등이 제대로 전달됐을 리가 없었다. 국정원 보고서를 받아 본 DJ로서는 여론의 질타가 ‘탄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김 차장이 2001년 중반기에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가 드러나 옷을 벗게 되는 상황을 보면 진실을 깨달은 DJ의 분노는 대단했던 것 같다.
김 차장은 당시 신건 국정원장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을 때 강력 반발했었다. 국내 담당 파트 간부들을 모아놓고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곧 꼬리를 내렸다. 최고통치권자의 단호한 의지를 감지했던 탓이다. 대신에 신 원장에게 ‘간청’을 했다. 이틀 뒤로 예정된 딸의 결혼식 때까지만 경질 발표를 연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신 원장은 일소에 부쳤다. DJ가 김 차장의 하소연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냉정했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다.
DJ를 수시로 독대하며 민심과 정치권 흐름을 전했던 박지원 문화부장관이 2000년 9월에 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 연루 의혹을 받아 사퇴했던 것도 공백이었다. 여권 핵심관계자는 DJ의 정보수집 체계가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시스템이 아닌 개인적 친분관계에 의해 가동된다는 게 정보수집 체계를 취약하게 만들어왔다. (DJ는)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박지원 김옥두 등에게 서로 다른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았다. 그들은 서로 무슨 오더를 받았는지 몰랐다. DJ 본인이 최종적 판단을 내리고 조정했다.”
DJ는 이들 권력 핵심들을 질책할 때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권노갑 한화갑 등을 질책할 때는 박지원 한광옥 등을 동원했고, 역으로 박지원 한광옥 등은 권노갑 등을 통해 견제했다.
권력 핵심들의 사이가 원만했다면 문제는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이들 간의 권력갈등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DJ가 제대로 보좌 받기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권력핵심들의 보좌기능이 제로(0) 포인트로 떨어졌다. 상호비방과 권력갈등만 난무했다. 2000년 9월 정동영 최고위원 등 초·재선 의원 13인이 세칭 ‘정풍운동’을 주장하고 나선 게 신호탄이었다.
권노갑 퇴진 및 국정쇄신을 단행해야 한다는 그들의 요구는 여권 내부를 사분오열시켰다. 당시 청와대에 “13인의 반란을 한 위원이 배후조종했다”는 보고서가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권 위원측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됐다.
DJ는 진노했다. 필리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한 위원이 청와대에 들어가려 하자 DJ가 “들어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는 소문이 나오기도 했다.
소위 대권주자 간에도 파열음이 요란했다. 취약한 당내 기반을 극복하고 차기 대선후보 위치를 굳히려던 이인제 최고위원은 한 위원과 정 위원을 비난했다. 이 위원은 기자들과 만나 “정 위원이 청와대에 들어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기 주장이 하나도 없다. DJ에게 건의한 내용이 전부 다른 사람 의견이었다. 명색이 정치인이라면 ‘내가 볼 때 이렇다’는 대목이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고 꼬집었다.
김옥두 사무총장은 13인의 반란과 관련, “이번 사태의 발단은 최고위원 한 분이 지난달 의총에서 당정을 쇄신해야 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언급, 한 위원에게 화살을 겨냥했다.
권 위원측은 한화갑, 정동영, 김근태 위원 등이 정풍운동을 벌이는 진짜 이유가 이인제 위원에게 있다고 보기도 했다. 한 위원 등이 ‘권노갑-이인제’간의 연대를 파괴해야 당내 대선후보 경쟁에서 이인제를 꺾을 수 있다고 보고 정풍운동을 벌인다는 분석이었다.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최고위원도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이인제 위원을 공격했다.
▲ 민주당 쇄신파의 퇴진 요구를 받은 권노갑 전 고문(왼쪽) 은 이의 배후에 한화갑 의원(오른쪽)이 있다고 주장하며 갈등을 빚었다. | ||
실제로 DJ는 당·정·청으로부터 국정쇄신 보고서를 제출 받은 뒤 12월21일 서영훈 대표를 교체하고 김중권 위원을 새 대표로 임명한다. 권노갑·한화갑계 중 어느 쪽도 김 신임 대표를 밀지 않았다. 정풍운동을 주창하던 소장파들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과거 민정계 출신이라는 경력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구여권 인사들이 조언을 했다는 얘기 정도만 들렸다. 단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만이 김 대표를 지원사격했다는 일각의 관측은 흥미롭다.
박 전 장관과 김 대표는 당시 여권 내에서 ‘양갑 동반퇴진론’을 언급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DJ에게 김 대표 카드를 천거한 사람은 바로 김 대표 자신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김 대표는 DJ의 11월 싱가포르-브루나이 순방 때 동행했다. 그때 당정쇄신 리포트를 ‘한 보따리’ 싸들고 갔다고 한다. ‘양갑 갈등’의 문제점도 집중적으로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김 대표는 청와대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영 위원이 국정쇄신을 주장했을 때 참석자 중 유일하게 DJ를 옹호했다. “여당이 청와대에 책임을 돌려서는 안되고 나눠서 져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김 대표의 태도가 DJ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DJ는 싱가포르 방문 때 생일을 맞은 김 대표에게 화환을 보낼 정도로 애정을 표시했다.
당시 김 대표 카드는 권력투쟁을 벌이던 모든 주체에게 충격이었다. 권 위원은 김 대표가 취임 통보를 받은 뒤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았다. 민주당 내 차기 대선후보 경쟁에서 선두를 질주하던 이인제 위원에게는 위기였다.
김 대표는 차기 대선 출마 의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해왔었다. 이 위원 입장에서는 DJ의 ‘영남후보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뜻했다. 영남후보를 꿈꾸고 있던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도 “기회주의자는 포섭대상이지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고 김 대표를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였다.
한화갑, 정동영, 김근태 위원 등에게도 김 대표의 출현은 무언의 압력이었다. 김 대표 임명은 정 의원이 요구했던 국정쇄신과는 전혀 방향이 다른 인사였다. 오히려 DJ는 이해찬 의원을 신임 최고위원으로 임명했다.
정 의원 등은 대중적 이미지에 치중해서 DJ를 공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반면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 위원은 여권 내에서 실무능력을 갖춘 인사로 꼽혀왔다. DJ가 정 의원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DJ에게 노벨상 수상은 평생 노려오던 영광이었다. 기묘하게도 DJ의 가신그룹은 그 시기에 사생결단식 권력투쟁을 벌였다. 그로 인해 DJ의 집권시스템은 본격적인 와해기에 접어들게 됐던 셈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