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보다는 자신의 출세욕이 앞서는 검사들을 더러 봤다. 검찰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부서에 가서도 출세에 급급해 재벌 회장의 측근이 된 검사를 봤다. 정치권 주변을 맴돌며 대통령후보의 돌격대로 상대방을 모략하다가 불나방같이 타 없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영혼은 실종되고 야심만 남은 것이다.
검찰의 초청을 받아 검사와 수사관들 앞에서 지난 삼십 년 동안 보아왔던 수사과정의 문제점들을 솔직히 강연한 적이 있다. 그 속에는 변호사인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절규를 담은 경험이 들어있었다.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서 바늘 같은 시각을 가진 검사나 수사관들은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건 오래전 있었던 신화 같은 얘기라고 치부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고위직 검사에게 옷을 허름하게 입고 아무 검찰청이나 같이 가서 민원인이 되어 보자고 했다. 거기서 말은 끊겼다.
직업상 더러 검찰청을 찾아간다. 겸손한 검사도 있고 모멸감이 느껴지는 건방진 검사도 있다. 검찰서기 중에는 검사보다 더 역겨운 권력의 냄새를 풍기는 존재도 있었다. 교만한 검사일수록 텅 빈 속을 완장이나 금배지로 치장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권력 주변에는 똥파리가 모이기 마련이다. 법 규정에 있는 검사는 정의의 화신이고 인권옹호의 보루다. 그래서 힘도 주고 대접도 해 준다. 업자들의 유혹을 받지 않는 자기철학이 분명한 사람이 국민이 바라는 제대로 된 검사다. 그런데 내가 본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검사가 될 청년에게 임관 후 주변의 누군가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제의하면 그 도움을 받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받겠다고 했다. 얼마까지 돈을 받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 달에 월급 정도까지는 받아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몇 년만 모이면 억대가 넘는 거액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제야 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너무 많은가요?”라고 되물었다.
우수한 성적만 추구하던 그 청년의 내면은 사회적 미숙아였다. 여성 피의자를 성추행한 병아리 검사가 있었다. 그와 같이 공부했던 학생들은 사고가 터질 것 같은 예감이 이미 들었다고 했다. 공부는 선수지만 검사의 권한을 자신의 향락과 만족의 도구처럼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그의 가치관에 반발을 느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사건 노출 직전 재빨리 합의를 해서 법망을 빠져나갔다. 머리 좋은 그는 죄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관리에 철저하지 못하면 고참 검사도 마찬가지다. 뇌물죄로 사표를 낸 지청장의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친한 이웃이 있었다고 했다. 명절선물을 박절하게 거절할 수 없어 받다보니 점점 더 액수가 커지고 결국엔 뇌물죄로 걸려들었다. 후배 검사에게 조사를 받다가 왜 받았느냐고 질문을 받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할 말이 없더라고 했다. 자기철학이나 가치관이 없어 보였다.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강철중 검사’는 사회정의와 인권옹호의 화신이다. 재력과 권력에 저항하며 악의 세력과 싸우는 투사였다. 동시에 약자의 눈물을 이해하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런 검사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