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 후보자 인사 실패가 민심 이반으로 이어지자 박근혜정부는 강도 높은 사정 정국을 조성해 국정 장악력을 다질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신문 DB
역대 대통령들은 정권 초반 검찰·경찰·감사원 등 사정기관을 동원해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정권 교체시기에 느슨해진 공직사회 군기를 잡고, 정·재계를 길들여 남은 임기 동안 원활한 국정 운영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였다. 대통령들이 사정기관 수장 자리에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을 발탁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는 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낳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권 출범과 함께 전방위 사정을 몰아붙였고, 이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인수위 시절부터 일부 측근 그룹과 함께 사정에 대한 구상을 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엔 박 대통령 핵심 참모와 법조계 지인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 몇몇은 현 정부에서 고위 공직을 맡고 있어, 사정 로드맵이 제스처가 아닌 실현 가능성이 높은 사안임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친박 관계자는 “여러 차례의 모임을 통해 몇 가지 사정 로드맵을 만들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사정기관 수장을 임명할 때도 그때 작성했던 문건이 고려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 1단계-각 기관 몸풀기
최근 검찰은 해외 원유개발 업체 인수 과정에서 거액을 받은 혐의로 한국석유공사 전·현직 직원 두 명을 구속했다. 민영화되긴 했지만 공기업 성격이 강한 KT&G도 국세청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이러한 소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박근혜 정부의 사정 드라이브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취임 전부터 준비했던 사정 로드맵에서도 공기업은 금융기관과 함께 가장 최우선 대상으로 분류됐다.
박근혜 정부는 총리실과 감사원 감찰 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비위를 적발,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현재 민정수석실을 컨트롤타워로 하는 사정당국은 공기업들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 사이에 실시했던 입찰과 관련된 부분을 광범위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일부 금융기관도 사정 정국 초반 리스트에 올라 있다. 지난 3월 19일 검찰이 외환은행을 전격 압수수색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풀이된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공기업 및 금융기관에 대한 기강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본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대통령이 5년 동안 국정과제를 잘 수행하려면 우선 공기업과 금융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인사 ‘물갈이’의 전초전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윤호석 평론가는 “대통령은 인사를 통해 힘이 나온다. 그렇다고 기존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무작정 나가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면서 “역대 대통령들은 공기업 등에 있는 전 정권 인사들을 배제하고 측근들을 기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정을 적절하게 활용했다”고 덧붙였다.
사정당국은 또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정권 초 공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수사가 비교적 손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에게 ‘실적’을 보여줘야 할 사정기관들이 앞다퉈 공기업과 금융권 수사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공기업에선 권력 암투가 벌어진다. 특히 전 정부에서 잘나갔던 인사들의 비리 제보가 내부로부터 쏟아진다. 기업수사에 비해 쉽게 진행되는 이유”라고 전했다. 또 다른 사정당국 고위 인사도 “본격적인 사정 정국을 앞둔 각 기관들의 몸풀기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면서 “공기업은 세금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공을 들인 것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 2단계-재계 길들이기
박근혜 정부의 본격적인 사정 칼날은 재계를 향할 전망이다. 이는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내걸고, 중소기업 우대 정책을 연일 강조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현재 검찰을 필두로 ‘재계 저승사자’ 공정위, 국세청, 관세청, 경찰 등 거의 모든 사정기관들이 재계 비리 수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는 박 대통령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권 초기 몇몇 그룹들이 철퇴를 맞곤 했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나 범위 면에서 역대 최고가 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어 재계는 바짝 엎드린 상태다. 재계는 대관 업무 인원을 총동원해 사정기관들 동향 파악에 나서고 있다. 또한 현 정권 실세들과 줄을 대려는 모습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관계자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들이 어디 있겠느냐. 기업 입장에서는 그저 무사히 넘어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사정 로드맵에 따르면 재계의 사정 드라이브는 크게 ‘투트랙’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우선 민생과 직결되는 기업 범죄 단속 및 처벌 강화다. 여기엔 ‘골목상권 침해’를 야기하는 대기업의 무차별적인 사업 확장도 포함된다. 또한 중소기업이나 서민들을 울리는 경제사범 적발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서울중앙지검이 검사 29명을 배치해 서민생활침해사범 합동수사부(합수부)를 발족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근혜 정부는 총수 일가 비리에도 메스를 들이댈 것으로 알려졌다. 부의 부당한 세습, 내부거래를 통한 재산 불리기, 역외 탈세 등을 근절하기 위해서다. 특히 재벌 2·3세들이 집중 타깃이 되고 있다. 재벌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겠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최근 검찰은 4대그룹 중 한 곳의 3세에 대해 비리 혐의를 포착하고 은밀히 자료 확보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서초동 주변에서는 해당 재벌이 ‘특수수사통’ 채동욱 검찰총장이 이끄는 검찰의 첫 ‘표적’이 될 것이란 말이 나돌고 있다. 또한 검찰의 서미갤러리 수사에서도 대기업과의 부적절한 미술품 거래가 드러날지 주목되고 있다.
# 3단계-최종 타깃은 정치권
4월 5일 몇몇 매체들은 한 민간갤러리와 이명박 정부 실세들 간 커넥션에 대해 사정당국이 내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A 갤러리가 정부예산을 따내고 국제규모 행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전 정권의 고위직 인사 및 국회의원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게 골자다. 사실 이 내용은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 이미 지난 2011년부터 꾸준하게 나돌았던 얘기다. 심지어는 의혹이 제기된 고위직 인사와 A 갤러리의 여자 관장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었다. 전병헌 민주통합당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A 갤러리 관장을 빗대 ‘제2의 신정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관련 의혹의 실체보다는 새삼 언론에 거론된 배경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소식을 접한 기자들과 사정기관 관계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이 내용이 지금 왜 다시 나왔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근혜 정부가 전 정권을 겨냥해 의도적으로 흘렸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A 갤러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고위직 인사는 이 사안 외에도 여러 건의 구설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사정 로드맵에 따르면 1·2단계를 거친 후 사정국면은 자연스럽게 정치권 및 MB 정권 실세로 이어진다. 공기업 또는 기업을 수사하다 보면 4대강과 같은 이명박 전 대통령 역점 사업과 맞물릴 수밖에 없고, 여기에 연루된 정치인들 수사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금융권 수사 역시 지난 정부에서 ‘4대 천황’으로 불렸던 이 전 대통령 측근 ‘금융맨’들이 금융계를 좌지우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사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장담할 수 없다.
사정 로드맵 작성에 관여한 친박 관계자는 “정권 보복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어 신중하게 진행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단절하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라면서도 “큰 틀에서는 3단계로 사정이 이뤄지겠지만 이 과정에서 각종 인허가에 따른 청탁 로비를 비롯해 (A 갤러리 건처럼) 지난 정권에서 묻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정치인 비리도 적지 않을 것이다. 수사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Ayo.co.kr
‘박근혜 지역구’ 검사들 승승장구 박 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파워를 가지게 된 서울중앙지검장에 TK 출신을 기용한 것은 검찰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향후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과 채동욱 검찰총장 간 파워게임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런데 조 검사장의 인사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 의원 시절 지역구였던 대구에서 근무했던 검찰 인사들이 현 정부 들어 승승장구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2009년 8월부터 2011년 1월까지 대구고검장을 역임했고, 곽상도 민정수석의 경우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을 끝으로 검사 생활을 마감했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