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대기업은 정말 타도의 대상인가? 대기업이 없을 경우 당장 국민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런 역할 때문에 대기업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기업이 크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다. 규모의 경제 장점이 크다. 그러나 독점의 힘을 잘못 행사할 경우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기업이 거꾸로 사회를 지배한다.
우선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중소기업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들의 하청업체로 예속되어 있어 일감을 안 주면 하루아침에 쓰러진다. 우리나라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사실상 대기업들이 국민의 생계를 볼모로 잡고 돈을 번다는 뜻이다. 최근 대기업의 독과점 병폐가 심해 경제가 고용창출 능력을 잃고 실업자를 쏟아내고 있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대기업이 어떤 상품을 만드는가에 따라 국민들의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느 지역에서 생산하는가에 따라 지역발전이 바뀐다. 어떤 사회공헌을 하는가에 따라 사회발전이 달라진다. 어떤 문화사업과 스포츠사업을 하는가에 따라 국민의식이 달라진다. 정치권에 어떻게 로비를 하는가에 따라 정책의 내용이 달라진다. 실로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대기업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경제력이 집중되면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선의를 가져도 대기업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경우 선의의 차원을 넘어 경제력 집중을 의도적으로 꾀한다. 납품가를 후려치거나 기술을 빼앗아 중소기업의 이익을 부당하게 차지한다. 자녀나 친인척 명의로 계열사를 만들어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빼앗는다. 일감 몰아주기로 경영권을 세습하기도 한다. 독점 이익으로 부동산 투기도 서슴지 않는다. 무한 탐욕에 빠져 경제 자체를 사유화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쓰러뜨리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성장 동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경제민주화는 불가피한 조치다. 더욱이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정보와 과학기술을 융합하여 중소, 벤처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새 정부의 창조경제는 바로 이러한 경제민주화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최근 정부는 경기활성화, 부동산대책, 국민행복기금 출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경제민주화가 퇴색하는 분위기이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기존의 순환출자도 단계적으로 금지시키는 등 대기업 개혁에 더욱 강력한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개혁은 타의에 의할 경우 형식적인 변화로 끝날 수 있다.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개혁은 스스로 하는 개혁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이 자율적으로 몸집을 줄이고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이것이 진정 대기업도 살고 사회도 사는 길이다.
서울대 초빙교수(전 고려대 총장) 이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