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 등 상품권 시장은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지인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 대목을 맞는다. 사진은 명동 거리 풍경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괴롭다. 명절이 다가오면 종업원들에게 선물도 해야 하고, 상여금도 줘야 하고, 거래처 선물 준비도 해야 하고, 추석이 되기 전에 그동안 지급하지 못한 인건비나 거래처 납품대금, 하도급 대금을 다 지급해줘야 하니 말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요즘 같은 시중자금 사정 아래서는 명절이 없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기업들의 자금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정부에서도 이런 기업들의 자금 사정을 감안해 매년 명절 전에 긴급자금을 풀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명동을 비롯한 기업자금시장의 풍경이 바뀌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중소기업들이 종업원들에게 떡값 명목으로 적은 상여금이라도 주려고 은행이나 자금시장의 문턱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상시 구조조정 체제를 갖추는 등 세월이 변하면서 직원들 상여금 준다고 자금 마련하러 다니는 기업주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는 ‘없으면 같이 굶는다’는 식으로 트렌드가 변화한 것이다.
그래서 명동에 오래 있던 업자들의 입에서는 매년 돌아오는 두 번의 명절 때마다 “지금까지 겪어본 명절 중에 최악, 최고로 힘들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과거에는 은행에서 공급하는 명절특별공급자금을 서로 받아가려 했지만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이 중소기업자금이 목표를 다 채우지 못하고 남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업의 자금을 융통하는 시장과는 다르게 명동이나 강남 일부 시장에서도 명절이면 대목을 맞는 업종이 있다. 다름 아닌 상품권 시장이다. 상품권은 명절에 선물용으로 수요가 아주 많은 분야다. 상품권의 할인 시세는 명절이 가까워질수록 비싸지다가 명절이 지나고 나면 하락한다. 상품권의 종류도 다양하다. 백화점상품권을 비롯해 주유상품권 문화상품권 제화상품권 등이 대표적이다.
명동에서는 이런 상품권을 매입하기도 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매입과 판매의 차익으로 수익을 만드는 구조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 시장은 그야말로 대목을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한다.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고 할인율도 조금씩 다르게 책정해 경쟁한다. 백화점에 가서 사려고 하는 상품권을 5%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이렇게 ‘기특한’ 상품권이지만 얼마 전엔 커다란 사회적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한때 나라를 발칵 뒤집었던 ‘바다이야기’ 때문이었다. 바다이야기 파문 당시에 명동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오락기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주는 상품권이 더 큰 문제였다. 당첨금을 돈으로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해 업주들은 상품권으로 지급하고 상품권을 받은 사람들은 바로 옆의 환전소에서 10%의 수수료를 공제하고 바로 현금화했다. 오락기 사업이 아니라 명동에서는 이 상품권 환전사업에 주목을 했다. 실제로 이 사업에 뛰어든 업자들도 여럿이 있었고 큰 곤욕을 치렀다.
상품권이라는 게 본래 환금과 유통이 가능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상품권들은 실제로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바다이야기 이전에는 카드로 상품권을 팔았다가 다시 사들이는 소위 ‘카드깡’이 시장을 휩쓸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이 카드로 상품권을 사고 바로 옆에 가서 다시 팔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업자들은 꿩 먹고 알 먹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당연히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 지금은 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하는 데 금액 제한 등 제도적인 장치가 있지만 당시에는 자유화란 명목 아래 성행했다.
다시 명절 이야기로 돌아가자. 명절이 지나면 상품권을 다시 팔려는 사람들로 명동 시장이 붐빈다. 명절에 선물로 받았던 상품권을 팔아서 현금화하는 경우다. 이 가운데엔 기업에서 비자금을 만들려는 사람도 보이지 않게 끼어있다. 상품권을 선물용으로 대량구매해서 다시 되판다면 당연히 현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액의 수수료가 나가지만 수수료보다도 효과가 크기 때문에 일부 기업에서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상품권은 알뜰한 소비를 하는 현명한 소비자들이 이용하면 아주 유용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유용하고 편리한 상품권도 다른 방면에서 활용하면 탈법이나 불법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돈이란 놈의 속성과도 같다. 그래도 사람들은 돈이 좋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운 명절이 더 어렵고 춥게 느껴지는 것도 돈이 없어서 아닐까.
한치호 ㈜중앙인터빌 상무 one1019@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