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에 대해 “원안+알파가 필요하다”며 원안 수정을 공식 선언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일요신문 DB
2008년을 미국산 쇠고기 촛불 파동 수습으로 국정 드라이브에 시동도 걸어보지 못한 이명박은 2009년에는 ‘세종시’라는 암초를 만난다. 2007년 9월, 본격 대선판이 불붙었을 때 이명박의 말 한마디 “세종시를 반드시 지키겠다”가 스스로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그 다음달 이명박이 충청권 공약사업으로 “충청권에 6만 6000㎡ 규모, 인구 50만 명을 목표로 하는 국제과학기업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바로 잡았지만, 이미 충청민의 뇌리 속에는 ‘세종시 사수’라는 단어만 박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이명박이 천명한 ‘세종시 사수’는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가 아니라 세종시가 충청권 발전을 이끌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막고 싶은 심정” “공무원들 점심값 가지고 어떻게 (충청권)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냐” “양심상 그 일(세종시)은 그대로 하기 어려울 것” “백년대계에 타협은 없다”등의 세종시를 두고 발언한 이명박의 언급은 세종시는 절대 행정중심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명박은 촛불 파동으로 잃은 동력을 ‘녹색성장’으로 다잡으면서 세종시를 ‘녹색성장도시’나 ‘과학기술도시’ 등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노 전 대통령의 행정수도 충남 이전 공약에 따라 2003년 신행정도시건설추진기획단이 출범했고, 2004년 8월 충남 연기·공주 일원, 공주·논산 일원, 천안, 충북 진천·음성 일원 등 4개 후보지에서 연기·공주 지역이 최종 후보지로 확정돼 있었다. 입지 선정→토지 확보→계획 수립→토지 보상→용지 조성까지 마친 상태였으니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던 것이다.
작금에 와서도 문제지만 당시에도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의 세종시에 대해선 반대론이 극심했다. “행정기능이 나뉘게 되면 부작용이 만만찮다” “서울과 거리가 멀어 업무처리 지연으로 인한 시간 낭비와 비효율을 초래한다” “청와대와 입법부, 사법부 모두를 옮기지 않고 일부만 이전하는 것은 뇌를 반쪽 내는 것과 같다” 등등의 비판론이 고조됐다.
행정도시보다는 과학, 교육 기능이 복합된 클러스터로 콘셉트를 바꿔야 한다. 친환경적인 중저밀도 주거단지를 조성해 인근의 대학과 연구시설, 산업시설을 활용한 자족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지금과 같이 그때도 똑같았다. 실험적 과학교육도시 이야기도 나왔지만, 거짓말처럼 당시에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세종시 원안대로라면 이전 대상 기관과 공무원은 불과 ‘9부 2처 2청’에 1만 명 규모였다. 산하기관과 연구기관 인력까지 포함해도 36개 기관에 1만 2000명에 불과했다. 50만 명의 자족도시가 목표였지만 실은 인구 6만 명 채우기도 빠듯했던 것이다. 호주의 캔버라, 뉴질랜드의 웰링턴,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등 전 세계 각 국의 행정수도 실험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특히 독일은 베를린과 본이라는 이중 행정수도는 업무 비효율을 가져오고 있다는 결정적인 모범 사례가 있었음에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이 10월 재보선 선거에 추가되면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으로선 충청권 삼국지에서 승리해야만 ‘충청 교두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이 ‘충청권 맹주’를 두고 총력전이었으니 세종시 수정 추진이 몰고 올 불상사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명박이 세종시 수정 추진의 수문장으로 ‘정운찬 총리’ 카드를 내민 것은 두고두고 회자하는 대표적인 ‘실정’의 하나다. 당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충청 인사를 총리에 내세워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려는 의혹에 대해 이이제이(以夷制夷:한 세력을 이용해 다른 세력을 제어함)라고 비판했고, 민주당에서는 나아가 이충제충(以忠制忠)이라 표현하면서 공세에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11월 27일 생방송 된 ‘대통령과의 대화’에 출연해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친이명박계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친이계 모임인 ‘함께 내일로’와 이명박 정부의 산실인 ‘안국포럼’ 출신 의원들은 원안 수정을 위한 동력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반면 친박계는 박근혜 의원의 의중을 살피며 ‘원칙론’ 즉,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쪽으로 원안 사수에 나선다.
11월 4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가 시발탄이었다. 친이계인 홍준표 의원이 “세종시 원안이 잘못됐으면 개정할 권리는 국회에도 있고, 정부에도 있다. ‘절대불가’라는 원칙을 세워놓고 개정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문을 열자, 친박계 리더격인 홍사덕 의원은 친이계가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이야기에 대해 “국민투표론까지 나오는데 충청 사람은 전 국민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를 처음 실행한 이래 이런 비겁한 국민투표를 한 적이 없다”고 맞섰다. ‘비겁’ 운운하면서 감정싸움으로 치닫게 된다.
앞서 박근혜 의원은 정운찬 총리가 자신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의회민주주의 시스템 아래서 국민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지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저를 설득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야 할 것”이라고 맞선다. 18대 국회에서 사사건건 ‘여당 내 야당’을 자임한 ‘여의도 대통령’ 행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국민이 간과한 것은 이명박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사실 이명박을 향한 야권의 비판은 대부분 이명박이 포퓰리스트의 전형이며, 대중영합을 너무나도 잘하는 사람으로 매도해 왔다. 하지만 세종시에 대해선 이명박은 표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언론과 충청민이 이명박의 반대론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살폈다면 지금의 행정 비효율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세종시에 대해 박근혜 의원이 ‘세게’ 나간 것은 그에게 ‘꽃놀이패’와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와 원칙의 이미지를 재각인시키는 기회이자, “세종시에다 원안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의 대권 가도에서 꼭 필요한 충청권 표심을 얻을 기회였다. 원안보다 나을 경우에도 박근혜 덕, 원안보다 못할 경우에는 이명박 탓이 된다는 것. 박근혜 의원의 발언은 ‘지역 이슈’도 ‘정치 이슈’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파괴력을 갖추게 되면서 이명박 호는 세종시에서 나아가 박근혜라는 암초에서 사사건건 좌초되기 시작한다.
세종시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들이 집대성된 핫이슈였다. 여의도 정치 경험이 없는 이명박으로선 애를 먹기 딱 좋은 현안인 셈이었다. 대중영합주의, 지역주의, 기회주의, 국회의 점거농성과 강행처리, 국론분열, 계파갈등, 말 바꾸기, 권력투쟁 등에다 미디어법이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이슈처럼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대립에 ‘지역 변수’가 더해진 고차방정식이었으니, 이명박으로선 난제였다. 그의 리더십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당시 이완구 충남도지사는 “세종시 건설은 지난 7년 동안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공약이 된 사안이고, 2005년에는 여야 간 표결로 합의된 사안이었다. 2200만 평에 이전된 행정기관을 중심에 두고 자족적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교육, 과학, 의료, 첨단지식, 문화, 체육 기능을 보강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수도권 과밀화와 집중화에 따른 불균형발전을 바로잡는 국가균형발전”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한다(이후 그는 사퇴한다).
한나라당 ‘분당설’도 제기되면서 이명박으로선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치킨게임처럼 마주 보고 달리면서 차기 주자(박근혜)와 현직 대통령이 너무 일찍 대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이 완성되면 박근혜가 거부하고 내분이 인 뒤 친이계든 친박계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것이란 시나리오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명박의 결정적인 실책은 ‘이건희 사면’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 있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강원도와 스포츠계가 한목소리로 ‘이건희 구출’을 주장했고, 경제5단체도 기업인의 대사면을 정부에 공식 건의했는데 느닷없이 삼성과 청와대의 빅딜설이 회자한 것이다. 삼성이 세종시로 본사 또는 계열사를 이전하는 대신 이명박 정부가 특사를 감행한다는 음모론. 이건희는 당시 차명계좌를 보유하면서 조세를 포탈한 혐의로 2009년 5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바 있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세종시 탄생 배경 세종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토균형발전정책 공약의 하나로 행정기능 중심의 자족형 복합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해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에 근거, 중앙행정기관과 그 소속기관이 이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종시에 둥지를 틀지 않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공무원이 다수고, 지금까지도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아 행정 비효율이라는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