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대장주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이 ‘공매도 세력’과의 전쟁에 지쳐 회사를 팔겠다고 선언해 바이오업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16일 서 회장은 다국적 제약사에 경영권을 매각할 것을 밝히면서 연구개발에 쏟아 부어야 할 자금을 주가 방어와 공매도 세력과 싸우는 데 써왔던 것, 관계당국이 공매도 공격을 수수방관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회사와 관련해 악성 루머에 시달리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는 점도 피력했다. 일각의 우려를 의식했는지 “회사 여유 현금이 5000억 원 정도 된다”며 “회사가 어려워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발언 파괴력도 엄청났다. 서 회장이 “주식을 모두 매각할 것”이라고 밝힌 16일 셀트리온 주가는 전날(15일)보다 2400원 오른 4만 9800원에 마감했다. 거래량은 그 이전보다 많게는 20배가 넘는 641만 4668주를 기록했다. 셀트리온 주가는 이튿날인 17일부터 폭락하기 시작, 3일 연속 하한가를 포함해 2만 6650원까지 추락했다. 거래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4월 22일에는 2233만 6936주나 됐다. 이 과정에서 서 회장이 ‘주식 매각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소식도 흘러나왔지만 곧바로 서 회장이 “매각을 번복한 적 없다”고 못 박았다.
서 회장이 지분 매각을 선언한 지 불과 하루 만인 17일 셀트리온 측은 “서 회장 지분 매각 주관사로 JP모건이 선정됐다”며 지분 매각 작업에 속도를 냈다. 이 과정에서 주가는 연일 요동쳤고 셀트리온과 관련한 루머와 의혹도 여럿 제기됐다. 서 회장에 대한 ‘찬티’와 ‘안티’가 공방을 벌인 것은 물론이다. 분명한 것은 서정진 회장의 ‘샐러리맨 신화’가 지분 매각 선언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 충북 청주에서 제2의 고향 인천으로
서정진 회장은 1957년 충북 청주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진학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임에도 서 회장은 좋은 직장에 다니기 위해 상경했다. 서 회장이 다닌 고등학교는 서울이 아닌 인천의 제물포고등학교다.
서 회장은 인천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셀트리온 본사가 인천에 위치해 있고 송도에 셀트리온 공장과 생산시설을 마련해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천지역에서 셀트리온의 경제효과는 대단하며 서 회장의 영향력과 인적 네트워크도 막강하다.
인천시 연수구 셀트리온 본사 앞에서 한 직원이 걸어가고 있다.
1983년 건국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서정진 회장은 그해 삼성전기에 입사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상경한 그의 꿈이 이뤄진 셈이다. 서 회장은 3년 후인 1986년 삼성전기를 떠나 한국생산성본부로 직장을 옮겼다. 손병두 당시 제일제당 이사(현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KBS 이사장)가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 회장을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 회장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 대우그룹 컨설팅을 계기로 김 전 회장의 눈에 든 서 회장은 1991년 34세의 나이에 대우그룹 임원으로 전격 스카우트됐다. 당시만 해도 30대 임원이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재계 고위 인사는 “최근에야 나이, 학벌, 성별에 상관없이 파격적인 임원 인사가 종종 단행되지만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30대 임원은 흔치 않았다”고 회고했다. 1998년 외환위기가 닥치고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서정진 회장의 샐러리맨 생활도 막을 내렸다.
고속승진에 잘나가는 젊은 대기업 임원으로 촉망받다가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서 회장은 대우그룹에서 경영기획업무를 맡던 10여 명과 함께 1999년 사무실을 내 사업구상에 몰두했다. 바이오사업 전망을 밝게 본 그는 2000년 6월 (주)넥솔을 설립, 이 회사 대표이사를 맡으며 본격적으로 바이오사업에 뛰어들었다. ‘기획의 상품화’를 목표로 설립한 넥솔은 ‘바이오 전문 프로젝트 회사’로 당시 꽤 입소문이 돌았다.
넥솔은 세계의 유명 제약 기업의 바이오 프로젝트를 발굴해 직접 투자하거나 자본을 유치해 합작 형태로 바이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넥솔은 미국 바이오기업 백스젠의 에이즈 백신 생산공장 송도 건립을 이끌어 주목을 받았다. 이때 서 회장은 이미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기초연구 쪽에 치중하고 있지만 개발, 임상시험, 생산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바이오시밀러(바이오 복제약) 사업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서 회장은 사명을 셀트리온으로 변경하고 단순히 바이오 프로젝트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강조하던 ‘개발, 임상시험, 생산기술 확보’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서 회장의 이 같은 안목에 대해 일각에서는 “삼성이 생각하던 것을 이미 10년 전에 꿰뚫어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삼성이 지난 2011년 5대 신수종사업을 발표하며 바이오사업에 역점을 둔 것을 빗댄 것이다. 삼성이 하려는 바이오사업을 서 회장은 이미 10년 전에 간파했다는 것.
서정진 회장이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특강하는 모습.
실제로 넥솔 시절 서 회장이 유치한 백스젠의 에이즈 백신 생산공장은 미국 내 임상시험 실패로 무산됐다. 셀트리온으로 사명을 변경한 후 유치한 미국 제넨텍의 에이즈 백신 생산도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쯤 되면 자금은 말라가고 사기꾼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쪽에서 숨통이 틔었다. 2000년대 초반 3.3㎡(약 1평)당 150만 원대였던 인천 남동공단 용지를 ‘벡스젠의 송도 생산공장 건립’을 기회로 3.3㎡당 50만 원에, 그것도 10년 분할 상환 조건으로 샀는데 이 지역이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땅값이 200만 원이 될 만큼 폭등했다. 서 회장은 이를 담보로 수백억 원의 대출과 투자 유치를 한 방에 해결했다.
어려웠던 셀트리온 사업 초기, 서 회장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일을 이미 반복하고 있었다. 주식을 발행하고 이를 액면가로 사서 이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 물론 당시에는 주식을 발행해도 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서 회장은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이 최근 서 회장의 주식담보대출과 주가 방어, 계열사 간 거래 등을 연상시키고 있다.
#지분 매각 발표, 절체절명의 ‘샐러리맨 신화’
180㎝가 넘는 키에 체중 100㎏, 게다가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서 회장의 겉모습에서는 돈 많고 세련된 분위기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의 프레젠테이션(PT)을 접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일각에서는 서 회장에게 ‘PT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재계 관계자는 “서 회장의 PT를 듣고 나면 투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며 “우리말이건 영어건 능수능란한 말솜씨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증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008년 셀트리온의 우회상장 당시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지 않자 서 회장은 거래소 직원을 상대로 PT를 요청했다고 한다. 서 회장이 그만큼 PT엔 자신 있다는 얘기다. 넥솔 시절 서 회장을 알고 있는 한 인사는 “부하직원들에게 굉장히 엄하기로 유명하다”며 “대부분 일을 직접 챙기며 호통을 칠 땐 무서울 정도”라고 회상했다.
서정진 회장에게 사기꾼이라는 의혹의 눈초리가 없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제약 출신이 아닌 데다 사업 초기 프로젝트가 번번이 무산된 탓이 크다. 달변이라는 점도 한몫 보탰다. 그러나 줄기세포 연구 위주의 막연한 기대감보다 바이오시밀러라는 구체적인 사업과 생산시설 등이 셀트리온과 서 회장의 강점이었다.
셀트리온의 바이오시밀러 사업에 대한 기대감은 2001년 바이오벤처로 시작한 셀트리온이 12년 만에 직원 1500명을 둔 기업으로 성장하고 코스닥 시가총액 1위 기업으로 등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해 7월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셀트리온이 개발한 바이오시밀러 관절염 치료제 ‘렘시마’에 대한 품목 허가를 최종 승인했다고 발표한 날, 새로운 시장을 연 것과 더 이상 사기꾼 소리를 듣지 않게 됐다는 것에 서 회장은 기뻐했다.
2005년 미국 BMS제약과 10년간 2조 원 규모의 생물의약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서 회장의 폭탄발언 이후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셀트리온과 서 회장에 대한 의혹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서 회장이 아무리 부인하고 “진심을 믿어달라”고 호소해도 시장의 소란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열사 간 내부거래 현황을 접한 다른 재계 관계자는 “이것이 일감 몰아주기와 뭐가 다르냐”면서 “편법도 지나치고 악의적인 편법”이라고 혹평했다. 반면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비전을 보여주고 어느 정도 현실화시켰다는 점에서 사기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서 회장을 두둔했다.
서 회장의 폭탄발언 이후 외국인과 기관들은 셀트리온 주식을 연일 매도하고 있으며 개인 투자자들도 불만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셀트리온 투자자는 “공매도가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고작 공매도를 핑계로 돈을 챙기려 드는 것”이냐며 목청을 높였다.
심지어 우리나라 1세대 벤처기업가 중 한 명인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은 “대표가 주주가치를 위해 주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맞지만 공매도 세력으로 단기간 주가가 급락했다 하여 회사를 팔아버리겠다고 한 것은 옳은 판단일까”라고 반문하며 “악법도 법인데 고쳐가면서 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서 회장을 비판했다.
매각 주관사가 선정되고 셀트리온 측에서 속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로서는 서 회장의 지분 매각이 확정된 듯 보인다. 서 회장 쪽에서 지분 매각으로 얻게 될 1조 7000억 원가량의 자금 사용처에 대해서도 하나둘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샐러리맨 신화’가 완전히 무너질 것인지 아닌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