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포스코 CEO포럼에 참석한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자신의 사임과 관련해 정치적 외압이 없었다고 밝혔지만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지난 15일 오후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열린 포스코 CEO포럼(실적발표회)에서 사임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아직 임기를 1년이나 남겨놓은 상황에서 회장직을 놓는 까닭에 대해 그는 “오래전부터 임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은 이날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농담도 섞어가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경제개혁연대도 ‘포스코 회장직이 집권세력의 전리품인가’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민영화된 공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역행하는 정치적 구태 반복”이라 꼬집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스코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되는 기이한 현상이 이어지면서 ‘정치 외압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어가는 중이다.
사실 1년 전,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이구택 회장의 거취와 관련한 풍문은 끊이지 않았다. 이 회장은 지난 2003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유상부 전 회장 후임으로 회장직에 올라 2004년에 이어 2007년 2월 임기 3년의 회장으로 재선임된 상황이었다.
<일요신문>이 몇 차례 보도한 것처럼 임기가 2010년까지 보장돼 있던 이 회장에 대한 구설수가 퍼진 연유는 정부 출범 직후 시작된 정부 산하 단체장들 물갈이 작업에 있었다. ‘지난 정권 때 자리 꿰찬 사람은 나가라’는 식의 정부 방침이 지난 2000년 민영화됐음에도 공기업 이미지를 씻어내지 못한 포스코에도 영향을 미쳤던 셈.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포스코 관계자들은 “왜 아직 우릴 공기업으로 보는지 모르겠다”는 푸념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재풀인 소망교회 출신 인사들 사이에 이 회장 비토론이 나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이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쳐온 이들 인사들 내부에 ‘이 회장이 제철보국(철강 생산으로 나라에 보답한다)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 회장이 임기 연장에 급급해 외국인 주주들의 이윤 극대화에만 치우쳐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 회장은 포스코 안팎에서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왔다. 취임 이후부터 끊임없는 혁신을 강조해 포스코의 기업가치를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2007년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 공법(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가공 없이 바로 사용해 경제성과 친환경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법) 상용화에 성공했으며 그해 세계 철강업계에서 역량을 인정받아 국제철강협회 회장에도 올랐다. 반면 포스코에 의존적인 국내 중소 철강업체들의 경쟁력 강화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구택 회장의 입지를 불투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검찰 수사였다. 이주성 전 국세청장 비리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은 지난해 12월 포스코를 관할하고 있는 대구지방국세청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포스코가 국세청에 검찰수사 무마를 위한 로비를 펼쳤다는 정황을 잡고 세무조사 자료를 확보한 것이다. 당시 ‘검찰이 이 회장 자택도 압수수색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회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사실이 확인되지 않자 ‘검찰이 일단 집행을 보류한 것’이란 이야기가 다시 들려왔다.
압수수색 논란 이후 이 회장이 검찰수사 선상에 놓였을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올 2월 27일 주주총회(주총) 이후 이 회장이 입장표명을 할 것이란 전망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 회장이 외압에 못 이겨 주총 직후 자진 사퇴할 것’이란 관측도 심심치 않게 나돌았다. 이 회장은 세간의 예측보다 한 달 반가량 앞서 깜짝 사퇴 카드를 빼든 셈이다. 공교롭게도 지난 13일 이 회장이 심혈을 기울였던 파이넥스공장에서 폭발성 화재가 일어난 지 이틀 뒤였다.
세간의 눈은 외압 의혹과 함께 ‘포스트 이구택’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 회장의 사임 표명과 동시에 포스코 CEO 후보 추천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추천위는 2월 6일 이전까지 새 CEO 선정 작업을 진행한다. 추천위가 선정한 CEO 후보는 2월 27일 주총을 통해 정식 회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 지난 1981년 포스코 회장직이 생긴 이후 지금까지 외부 영입 사례는 1994년 김만제 전 회장뿐이었다. 내부 승진이 이뤄질 것이란 전제하에 이구택 회장과 더불어 포스코 대표이사를 맡아온 윤석만 사장, 그리고 얼마 전까지 포스코 대표이사진에 있었던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이 후임 물망에 오른다.
역대 포스코 회장들이 대부분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홍보맨 출신인 윤 사장보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정 사장에 무게가 기운다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이구택 회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외압설이 수그러들지 않는 탓인지 ‘낙하산’ 가능성도 거론된다. 여기엔 ‘KT 학습효과’도 한몫 거들고 있다. 지난해 남중수 전 KT 사장의 구속 사태로 공석이 된 사장 자리가 결국 내부 승진이 아닌 낙하산 논란 속에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KT 역시 민영화된 지 9년째 접어들지만 정치권으로부터 ‘공기업 대접’을 받기는 포스코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일각에선 새 회장 후보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진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 등이 거론된다. 최근 청와대 안팎에 개각설이 나돌면서 사퇴 요구가 끊이지 않았던 강 장관을 경질한 다음 포스코 회장직에 앉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설로만 나도는 개각 시기에 대해서 청와대가 확답을 내놓지 않는 가운데 이구택 회장이 덜컥 사의를 표명하고 갑작스레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강 장관에 대한 ‘포스코 회장 내정설’이 고개를 들고 있는 셈이다.
윤진식 전 장관은 노무현 정부 때 산자부 장관을 역임했음에도 현 정부의 신뢰가 두텁다. 현 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가경쟁력강화특위 부위원장을 지냈다. 지난해 4월 18대 총선에선 한나라당 충북 충주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들 중에 누가 회장직에 오르더라도 ‘청와대의 공신 배려’라는 논란을 비켜가긴 어려울 듯하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 이 회장 사임을 ‘포스코 낙하산 길 터주기’라고 몰아붙이는 터라 내부승진을 통한 신임 회장이 이 회장 잔여임기 1년 만을 채우고 내년에 낙하산 인사가 들어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윤석만 정준양 사장 등 내부 승진 후보들이 이구택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고, 외부 수혈의 경우 낙하산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포스코 출신의 다른 인사에게 회장직이 돌아갈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것이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 ‘포스코에서 사장을 지낸 한 인사가 현 정부의 대구·경북(TK) 실세들의 측면 지원을 받아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배경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