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증권사를 축으로 대형 투자은행을 키우겠다는 것이 자통법 시행의 목적이다. 사진은 여의도 증권가.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자통법이란 증권거래법, 선물거래법, 간접투자자산 운용업법 등 기존 자본시장 6개 법률이 통합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철저하게 영역이 분리되어 있던 증권사, 자산운용사, 선물회사, 종금회사, 신탁회사 등 자본시장 관련업이 하나의 업종으로 통합된다(은행과 보험은 여기서 제외된다). 이처럼 자본시장 관련업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미국 등 금융선진국의 IB같이 대형 투자업무를 할 수 있도록 각 시장 사이의 칸막이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규제를 최대한 없애 증권사를 축으로 대형 IB를 키우겠다는 것이 자통법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게 각 자본시장 관련업 간 칸막이가 없어지면 대형 IB가 탄생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동안 증권사들은 주로 개인투자자들의 돈을 위탁받아서 주식 매매를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세계적인 IB인 골드만삭스가 각종 파생상품으로 2007년 11조 원을 벌어들이는 동안 국내 증권사들은 3조 6000억 원을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 하지만 자통법 시행으로 증권사가 기업구조조정, 인수·합병(M&A), 기업상장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는 게 가능해지게 된다.
또 자통법에서 금지한 상품 외의 각종 파생상품을 새롭게 개발해서 팔 수 있게 됨으로써 사업의 범위를 무한 확장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이 단순히 저축과 대출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국내 금융시장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통법 시행으로 대형 IB를 향한 포석은 깔리게 됐더라도 실제 대형 IB가 국내에 들어서게 될지에 대해서는 증권업계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하고 있다. 자통법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8년 전이다. 2001년 5월 당시 정부가 향후 10년 뒤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비전 2011프로젝트’가 그 시작이었다. 여기서 금융산업 육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금융통합법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탄생한 것이 자통법이다. 구상에서부터 실행까지 무려 8년이 걸린 셈인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시대상황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미국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서브프라임모기지가 무너지면서 이를 토대로 만들어낸 각종 파생상품이 무너졌고, 이는 결국 IB의 몰락을 가져왔다. IB의 몰락은 이들이 내놓은 파생상품에 관여한 은행들마저 부실위기로 빠져들게 했고, 이는 전 세계를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로 꼽혔던 씨티그룹의 ‘금융백화점’(유니버설뱅크)이 이번 금융위기의 파고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한국 금융산업을 발전시켜 동북아 금융허브를 만들겠다며 역할 모델로 삼았던 씨티그룹이 해체된다는 것은 방향타 상실을 의미한다. 저기 멀리서 1등으로 달리고 있는 미국식 IB를 따라잡겠다며 8년을 뛰어왔는데 그 길이 낭떠러지로 향한 것이었던 셈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자통법 시행의 당위성을 부여해주던 글로벌 IB들이 몰락하는 바람에 국내 증권사들이 향후 추진 목표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라며 “말로는 내부 규정을 강화하면 몰락한 IB들의 전철을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금융산업에 상존해 있는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는 힘들다. 특히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세계적인 IB들도 무너졌는데 이제 막 시작하는 IB로 전환하는 국내 증권사들이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고 밝혔다.
우리나라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정부의 과도한 간섭도 자통법 시행으로 금융산업 발전이 이뤄질지에 대한 의문을 키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불거진 증권선물거래소(KRX) 이사장 자리를 둘러싼 논란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사장 자리에 자기사람 심는 데 실패하자 증권선물거래소 자체를 공기업으로 만들겠다며 1년 가까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국내외 증권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금융시장 선진화를 이루겠다면서 실제로는 가장 반대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초대 금융투자협회 회장 자리에 증권가에서 잔뼈가 굵은 황건호 회장이 결국 선임됐지만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정부 출신 인사들이 대거 몰렸던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금융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부의 구시대적인 행태가 지속되고 있다. 법에 따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힘자랑이나 자기 사람 심기를 위해 개입하면서 IB를 통해 금융시장 발전을 이루겠다는 것은 꿈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며 “우리나라 정부는 과거 금융시장이 발달한 역사를 지녔거나 지금 세계적인 힘을 발휘하는 금융산업을 지닌 나라들이 모두 정부 개입을 최소화했던 점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일본이 아무리 제조업이 발전해도 금융산업은 단순 은행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 정부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국내 증권사들의 역량이나 준비상황도 의문대상이다. 일례로 자통법 이후 금융투자업무 간 이해 상충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자본투자(PI) 부문과 IB부문을 분리해야 하는데 일부 대형사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조직 정비를 아직 못한 상태다. 이렇다보니 세계적인 IB를 추진하겠다는 거대한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해외 투자자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다.
모 증권사 고위간부는 “해외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기업설명회(IR)를 하면서 우리 증권사가 이러이러한 조직개편과 상품개발 등을 통해 IB를 추진하겠다고 하니까 ‘무슨 한국의 증권사가 IB를 하느냐.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아예 투자계획 자체를 철회하겠다는 투자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며 “나중에 다시 IR을 하면서 IB를 삭제한 내용을 발표하니까 그제야 제대로 방향을 잡아 가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국인들이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데다 정부나 국내 증권사도 IB 등을 통한 금융산업 발전을 이룰 마음가짐이 안 돼 있는 상황인데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의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