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민을 매일 눈 뜨고 감을 때마다 지겹도록 하고 있는 내게 언제부턴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주위에서 어울리게 되는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이 죄다 유부남들이 돼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 주위를 둘러봐도 또래의 싱글을 찾기란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사막에서 바늘찾기 같은 일이 돼버렸다.
사정이 이러니 언제부턴가 술자리나 밥자리에 나가면 유부남들 틈에 나홀로 싱글로 끼어 앉아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귀동냥으로 주워듣는 이야기가 많아졌고, 또 날이 갈수록 그 듣는 재미도 쏠쏠해졌다. 특히 술이 몇 잔 돌고 얼큰하게 취기가 오를 때면 하나둘 슬며시 토해내는 유부남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은 싱글인 내겐 (때로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때로는 처참하게 깨부숴줄 정도로) 귀가 솔깃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연봉이 높건 낮건, 전문직이건 샐러리맨이건, 이들이 하고 있는 고민들은 모두 엇비슷했고, 또 바람이나 소망도 다 고만고만했다. ‘사람 사는 건 다 같다’라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알게 된 한 이비인후과 원장의 의외로 평범하다 못해 놀라운 ‘사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였다. 명문 K 대 의대를 나온 A 원장. 그는 현재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40대 초반의 두 자녀를 둔 가장이다. 하지만 아무리 폼나는 개업의라고 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긴 매한가지. 먹고, 살고, 사랑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날 A 원장은 술잔이 몇 차례 돌자 나름의 사는 고민을 털어 놓았다. “우리 가족들 부족하지 않게 먹여 살리려면 하루에 환자를 150명은 봐야 해요. 그러면 환자 한 명당 보통 2분 안에 진료를 끝내야 하는데, 나는 그건 또 싫거든. 보통 5분 정도까지도 보기 때문에 그만큼 몸이 힘들어지지. 어떨 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이 급한데도 밖에 기다리고 앉아있는 환자들 때문에 못 가고 참는 적도 많아요.”
그렇게 아등바등 하루 목표치를 채우고 진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간 A 원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뭘까. 토끼 같은 자식들 재롱 보기? 두 발 뻗고 누워서 TV 보기? 아니면 고상하게 서재에 앉아 책읽기? 노노~. A 원장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신발 벗고 옷 갈아입고, 바로 부엌으로 직행해서 쌓인 설거지하고,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것, 그게 그가 집에서 맡은 임무였다. 그럼 아내가 혹시 맞벌이를 하냐고? 노노~. 아내의 임무는 육아 담당 및 집안 살림. 아내는 말한다. “평안한 가정을 위해 당신도 가사 노동의 일정 부분을 맡아줘야겠어요. 내가 하루종일 했으니까 저녁은 당신 몫. 콜?”
못 믿겠다고? 그날 밤 술에 취한 A 원장의 진솔하고 가슴 저 밑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한마디를 들었다면 아마 믿지 않고는 못 배겼을걸? “나, 이래봬도 명색이 의사인데, 집에서는 X도 아냐~!”
소주잔을 털며 울부짖던 A 원장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는 병원에 갔는데 혹시 그날따라 의사 선생님이 웬지 무뚝뚝하거나, 똥 씹은 듯 인상이 구겨져 있거나, 마치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서두르거나 그러면 “집에서 뭔 일 있으셨구만”이라고 한 번쯤은 쿨하게 이해해주기로.
사실 의사도 감정 노동자 아닐까? 물론 연봉으로 치자면 어마어마한 갭이 있겠지만, 그래도 로봇이 아닌 이상 의사도 사람이다, 사람. 더욱이 집에서는 평범해도 그렇게 평범할 수 없는 사람, 아니 남자다.
김태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