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와의 접촉을 꺼려오던 송기인 신부가 노무현 서거 4주기를 앞두고 <일요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에게 지난 4년은 어떤 의미로 자리 잡았을까.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혹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들지 않고 변호사 업(業)에만 충실했다면 좀 더 평탄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노무현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송기인 신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송 신부에게 ‘부산 시민운동권에서 후보 4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주저 없이 노무현을 추천했던 것. 대외적으로는 YS가 노 전 대통령을 정계로 이끌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노 전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하게 만든 주인공은 송 신부다. 송 신부는 기자가 ‘노무현’이란 이름 세 글자를 꺼내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한동안 뜨지 않았다. 인터뷰는 5월 15일 오후 3시 밀양시 삼랑진 송기인 신부의 자택에서 있었다. 초여름의 볕이 따스하게 감싸오던 날이었다.
“5월 23일 오전 9시 반경이었다. ‘신부님, 뉴스 보셨어요?’ 누가 급히 연락해왔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허겁지겁 부산대병원으로 달려갔다. 안치실에 누워있는 그를 봤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말문을 연 송기인 신부는 “목과 어깨에 멍이 심하게 들어있었는데, 얼굴은 깨끗하니 평온해 보였다. 오래전 내가 세례 준 이마. 그 이마에 다시 손을 얹고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편히 하느님 품으로 가시라’라고”하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천주교에서 자살은 죄 아닌가.
▲그렇지. 천주교에선 큰 잘못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경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었다고 본다. 일반적 개념의 자살과는 다르게 봐야할 것 같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노무현은 ‘상식이 무너진 사회의 희생자’라고.
―노 전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보는가.
▲당시 검찰은 노무현에게 망신을 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증거도 없이 그렇게 공개수사를 해댔으니. 특히 부인, 자녀, 지인들이 (검찰에게) 당하는 모습을 참아내기 힘들어했던 것 같다. 결국 자기희생을 한 거지. 난 사실 노무현보다 권양숙 여사가 더 걱정됐다. (권 여사가) 검사들에게 이루 말 못할 수모를 당하고 왔다.
―국민장 당시 경복궁 집례를 맡았다.
▲화장터에서 기도회를 갖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 바지를 잡고 그대로 무너지더라.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이 아궁이에 들어가자 ‘안 돼’ 하고 외치며 주저앉는데 당시 국민들이 그분의 심정과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인터뷰는 초여름볕이 따스한 밀양 삼랑진의 송기인 신부 자택에서 이뤄졌다.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변호인단을 구성할 때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당시 변호인단이 총 8명이었는데 박찬종이 나가고 노무현이 대신 들어왔다. 아, 노무현…(잠시 침묵) 얼마나 똑똑했는지 말도 못한다. 책을 많이 읽을 뿐 아니라 그 양반은 그걸 또 다 외워.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그만큼 아는 게 많아서 자신감이 넘치는 게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었다. 지나친 똑똑함이 훗날 타인의 의견을 종합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번은 ‘똑똑하다’고 혀를 내둘렀더니 노무현이 ‘그런데 대학을 못 갔습니다. 그래도 성당은 저를 받아주실까요’라고 하더라(웃음).
―직접 세례 해줬다고 들었다.
▲1986년 무렵, 권 여사와 함께 와서 세례를 받았다. 노무현의 세례명은 ‘유스토’. 정의, 올바름이란 뜻이다. 지금 이 자리를 함께 해주신 이재옥 이사장님이 노무현의 대부가 돼주셨다.
―노무현은 어떤 대통령이었나.
▲권력을 다 놓아버린 최초의 대통령이지. 노무현은 국정원한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너네 일만 하면 된다’는 주의였다. 검찰한테도 ‘본연의 일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역대 해방 후 정치에서 제일 청렴했던 게 노무현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자신도 그렇지만 특히 각료들 인선할 때 정말로 윤리적이었다. 지금 이명박, 박근혜처럼 군대 안 갔다 온 놈, 돈 많은 놈,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등 이런 인사와는 아주 달랐다.
―인사 관련 일화가 있나.
▲참여정부 시절 내가 대통령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 인사와 관련해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검찰개혁을 위해 적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추천했는데 청와대에서 한참이나 조사하더라. 결국 ‘부동산이 많아서 안 된다’며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는 인사와 관련해 여기저기 조언 내지 추천이 들어와도 밤새도록 세세히 살펴보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지금 정부야 국민이 뭐라고 반대해도 귀머거리처럼 굴잖아.
―참여정부 때 과거사정리위원장 직을 맡았다.
▲수차례 고사하다가 결국 시민들이 원해서 그 일을 했었는데 기간만 충분히 줬으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됐을 텐데 개인적으로 아쉽다. 결국 해체됐는데 이명박은 그걸 이어서 안하더라. 박근혜도 아마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을 거다. 거의 포기했다.
―참여정부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민화합을 못한 것. 국민이 조금 더디게 따라오더라도 국민과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데 그 점이 부족했다. 자기만 한발짝 앞서나가면 뭐하나. 방향은 옳았지만 국민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래도 노무현의 순수성, 의지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노무현이 독선적이었다 한들 이명박 정부보단 낫지 않았나. 대운하를 밀어붙이길 했나.
―노무현에게도 시련은 많았던 것 같다.
▲노 대통령 당선 후 문재인이 걱정하듯 그러더라. 기득권층이 쉽게 (노무현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실제로 그랬다. 특히 언론이 그랬지. 그래서 사석에서 J 일보 사장과도 많이 싸웠다. 그랬더니 그 사장이 자기도 신문은 잘 모르고 경영만 한다고 하더라.
―당시 검찰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검찰개혁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 거다. 노무현에게 임명을 받을 땐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겠지. 그런데 정권이 바뀌니 새 정권의 뜻을 안 따를 수 있었겠나. 개혁을 시작하다 만 셈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4주기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오고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노무현을 떠나보낸 후 그간 정치권은 대선과 총선 등 굵직한 선거를 치러냈다. 그 과정에서 ‘친노’ 세력은 결과적으로 ‘참패’한 셈이 됐다. 한때 ‘친노’가 이끌던 제1 야당은 최근 비주류 출신으로 주요직들이 채워졌고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아쉬운 패배를 맛봤다. ‘부엉이 바위’ 사건 이후 정치권에 짙게 드리웠던 ‘노무현’의 그림자가 걷히고 있는 것일까.
2005년 1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송기인 과거사정리위원장. 뒤쪽으로 문재인 민정수석의 모습도 보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친노는 흩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역사에 묻혀가는 거지. 아파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다.
―민주당의 존재감도 예전만 못하단 평이 나오고 있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면 뭐든지 안 되는 거다. 국민을 상대로 했으면 지난 총선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국민을 외면하고 ‘나눠먹기’만 하다 보니 일을 망쳤다. 속 좁게 (자리에) 집착하지 말고 국민을 믿고 국민에게 다가가야 성공할 수 있다.
―‘나눠먹기’라는 게 무슨 뜻인가.
▲공천 과정이 그랬다. 국민이 원하는 인재발굴을 외면하고 친분 있는 자들끼리 나눠먹기를 했다.
―이번엔 대선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문 의원을 지지한 걸로 안다(송 신부는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의원과도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왔다).
▲아쉽다. 노무현이 다소 독선적이었던 반면 문재인은 의견을 수렴해서 종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뭐랄까. 만능이야. 사람 자체가. 축구, 등산, 예술, 생물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 노무현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빠른 추진력을 보이지.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청렴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누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나.
▲문재인이 됐으면 우리나라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했다.
―노무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보는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분야는 확실히 추진하는데 전체를 수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자기 생각을 직선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서 세련되지 못했지.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는 노무현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2시간 정도 진행된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자 송기인 신부는 기자에게 ‘이제 그만 물어보라’며 순간 착잡한 표정을 비치다가 한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그러고 보니 엊그저께 권 여사하고 오랜만에 점심을 먹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나.
▲밥이 맛있단 얘기 정도했지(웃음). 1년에 한 번씩은 만나는데 다행히 권 여사는 건강한 것 같더라. 지금 사저는 기념관으로 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혼자 살기에 집이 너무 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적적하겠지.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었나.
▲노무현은 촌놈이야. 계산도 못하고. 직선적이고.
송 신부는 무심한 대답이 아쉬웠던지 “노무현은 어떤 야합이나 부정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착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말이 없었다. 노무현이 많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밀양=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노무현 스승 ‘민주화 대부’
송기인 신부는 1981년 부산지역 민주인사 22명이 이적 표현물을 학습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된 사건임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 부림사건을 무료 변론한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의원이었다. 송 신부가 1985년 결성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출신들이 훗날 6월 민주항쟁 때 부산국민운동본부(국본)를 주도했다. 당시 국본 집행위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이후 1989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부산본부 상임지도위원, 1996년 부산 민주공원조성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2000년 민주화운동정신계승 부산연대 공동대표를 차례로 역임했다. 재야에만 머물던 송 신부는 2005년 참여정부 시절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을 맡아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는 2년 치 급료 2억 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부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부산선 송 신부보다 유명
이재옥 전 신협중앙회 이사(왼쪽)가 송기인 신부의 인터뷰 때 같이 참석했다.
1986년 노 전 대통령이 송기인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을 당시 ‘대부’로 나섰던 인물은 바로 이재옥 전 신협중앙회 이사. 이 전 이사의 부인 고 김정자 여사(2003년 지병으로 작고)가 권양숙 여사의 대모다. 이재옥 전 이사 부부는 부산 출신으로 이 지역의 덕망 높은 인사로 알려진다. 부산에서는 송기인 신부보다 이 두 사람이 더 많이 알려질 정도로 지역 신망이 두텁다고 한다. 특히 10년 전 작고한 김정자 여사는 ‘성녀’로 불렸을 정도로 지역봉사에 힘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여사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애도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사제서품 그날 유신 선포
‘민주화 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는 젊은 날을 유신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날은 1972년 12월 8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유신이 선포되던 날이기도 했다. 당시 송 신부는 ‘일어나 가자’는 성경말씀을 표어로 서품을 받았다. 이 표어대로 신부가 되던 순간부터 ‘부림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등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된 굵직한 사건마다 그는 ‘일어나 가는’ 족적을 남겨왔다. 송 신부는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에 의해 48번이나 연행됐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도 깊은 편이다. 당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통령의 출범에도 남다른 소회가 있었다.
송 신부는 “사제생활이 박정희 유신독재와 더불어 시작됐다”며 “시대가 바뀌었는데 여전히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참 씁쓸하다”고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사회의 곪은 부분을 치유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과거 탓일까. 또 다른 ‘박’ 정권을 두고 그의 날선 비판은 계속됐다. 전직 과거사정리위원장이기도 한 송 신부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또 다시 과거사 논란으로 시끄러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능력으로는 그런 걸 (조율)하기 어려울 거라고 본다”고 혹평했다. 송 신부는 그렇게 평한 이유로 박 대통령의 성장 배경을 꼽았다. 그는 “박근혜가 지금까지 성장하면서 배운 것을 보라. 국가를 경영할 만한 자질이 없다”며 “청와대에서 공주였다가 군대를 가봤나. 논문을 발표해봤나.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노력이 통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5년을 참고 살아야지. 역시가 진보하다가도 정체될 때도 있는 거니까”라고 말했다.
끝으로 ‘박근혜 정권에게 조언해줄 것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조언할 가치가 있어야 하지”라고 짧게 답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