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의원이 5월 22일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을 맡은 최장집 교수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22일, 안철수 의원의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창립식이 열린 서울 서교동 창비(창작과 비평) 카페. 그곳에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백발의 노신사가 등장했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진보진영의 석학이자 정치학계의 거목으로 통하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였다. 이 자리에서 안철수 의원은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소장으로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최장집 교수를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지난 대선부터 함께한 장하성 교수는 어느 정도 예상된 카드였지만, 최장집 교수의 등장은 뜻밖의 ‘깜짝쇼’였다. 물론 정계 안팎에서는 오랫동안 안철수 진영에서 최장집 교수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있어 왔다. 안 의원은 지난 3월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 최 교수의 저서인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읽는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키며 주목을 끌기도 했다.
내일의 창립식이 있기 하루 전인 21일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까지도 안철수 의원이 최장집 교수를 모시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최장집 교수는 누구나 아는 의회 민주주의 신봉자 아닌가. 무당파인 안철수 의원에게 쉽게 넘어 가지는 않을 거다. 그것을 위해서는 안철수 의원 스스로 확실한 그림을 통해 최 교수를 설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이 정당을 기반으로 한 의회 민주주의를 줄곧 주장해 온 최장집 교수에게 자신의 확실한 그림을 통해 설득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안 의원은 본인 스스로 ‘십고초려’했다는 최 교수를 어떻게 설득했던 것일까.
일단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최장집 교수를 영입함으로써 크게 세 가지를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두 가지는 이미 얻었고, 마지막 한 가지는 이제 얻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최장집’이라는 인물 자체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최 교수를 두고 “진보 진영의 석학은 많지만, 의회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그만큼 탄탄 논리로 무장된 이는 많지 않다”며 “보수나 여권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인물”로 평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엇보다 최 교수는 지난 김대중 정부 때 1년간 정책 자문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당에서도 활동한 적 없는 신선한 인물이다. 안 의원으로서는 진보 진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을 영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안철수 의원의 신당 창당 의지를 확고히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안철수 의원이 최장집 교수를 설득할 수 있었던 핵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장집 교수는 오랫동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온 인물이다. 그의 패러다임 자체가 진보적이긴 하지만, 베이스에는 항상 ‘의회와 정당’의 민주주의가 깔려있다. 시민 네트워크와 같은 대안 정치와는 다소 거리를 둬 왔다.
최장집 교수 영입을 통해 안철수 의원이 내보인 신당 창당 의지는 무엇보다 안철수 진영 내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안철수 진영 내부에서는 안 의원의 신당 창당에 대한 애매모호한 자세와 의지에 속앓이를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측근으로 지목된 몇몇 인사들의 이탈 및 갈등 얘기도 나왔다. 이번 최 교수의 영입은 내부적으로도 이러한 불안을 상당히 덜어낼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안철수 의원이 앞으로 얻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은 역시 최장집 교수 뒤에 존재하는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과 그 조직이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최장집 교수 영입도 사실 어느 정도는 다 예상된 것 아니냐”며 “그 뒤에 손학규 고문이 있고, 안철수 의원과 손 고문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결국 최장집 교수의 영입은 손 고문이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22일 기자회견장에는 최장집 교수와 안철수 의원을 향해 ‘손학규 고문의 합류 가능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손 고문과 선을 그으며 부인했다. 하지만 최장집 교수는 손학규 고문의 서강대 교수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오며 후원회장 역할을 해왔다. 또한 최 교수는 장하성 교수와 함께 손 고문의 ‘동아시아미래재단’ 개설에 힘썼던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기자회견이 열린 장소도 동아시아미래재단 창립 기념식이 열렸던 곳이다.
결국 핵심은 신당 창당과 야권의 인물 경쟁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당에서 사람을 빼 와야 하는 것인데 손 고문 정도가 와야 가능해 진다. 김대진 대표는 “최장집 교수의 영입은 안철수 스스로 정당 정치를 하겠다고 천명한 것인데, 그러려면 역시 정당 시스템의 경험과 조직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 몫은 역시 손학규 고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안철수 의원이 본격적인 창당 작업에 앞서 지역 포럼들을 정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역 포럼 대부분 안철수 의원의 개인적 의지와 달리 자생적으로 조직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포럼 구성원 상당수는 여야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받기 어려운 이들 가운데 내년 지방선거를 바라보고 합류한 인사들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포럼들끼리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어 안 의원 입장에서는 분명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손학규 고문이 안철수 진영으로 합류한다면, 무엇보다 이러한 지역 조직들을 선별 및 정리하고 재조직화하는 작업에 앞장 설 가능성이 높다. 어찌됐건 안철수 의원은 여전히 정당과 조직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이는 손학규 고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손 고문은 오는 7월경 지지자·대학생 700여 명과 함께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뒤 귀국,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 아카데미를 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박정희정부 참여 이명박과는 동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에게는 의외의 과거가 많다. 무엇보다 진보학계의 거목으로 알려진 최장집 교수지만, 정작 그는 강원도 강릉에서도 손꼽히는 대지주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역시 경남 밀양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딸로 고등교육까지 마친 ‘신여성’이었다. 한마디로 태생부터 상위 1%에 속하는 최상류층이었던 셈이다.
61학번으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최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같은 시대를 풍미했던 동문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이 전 대통령과 함께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나선 인연이 있다. 당시 최 교수는 후방에서 조직과 이론을 담당했으며, 이 전 대통령은 전방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최 교수가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딛은 곳도 학계가 아니라 언론계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지금은 사라진 시사월간지 <세대>에서 1년간 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무엇보다 최장집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의외의 인연이 있다. 그는 1971년 청와대에 특채로 채용돼 2년간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활동했다. 연구소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윤주영 당시 청와대 대변인과의 인연이 컸다. 그의 경력 중 가장 의외의 행보기도 하다. 훗날 최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월간지까지 그만둬서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택한 길”이라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