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성추문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이 더 안으로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준필 기자
3일뒤인 5월 21일, 이번엔 방콕에 위치한 유명 음식점 ‘블루 엘리펀트’. 동행한 기자들과 식사를 겸한 간담회를 가진 정 총리가 건배사를 하기 위해 와인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잔을 채운 것은 와인이 아닌 노란색 오렌지 주스였다. 정 총리는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오렌지 주스 건배를 하게 된 사정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태국에서 날아든 ‘오렌지 주스 건배 사건’은 최근 청와대를 비롯해 공직사회 전반에 널리 회자된 에피소드다.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 수행 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문의 충격파가 미국 교포사회와 한국은 물론 태국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 단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리실 측은 이번 방문에 앞서 ‘무(無)알코올 순방’ 원칙을 공개적으로 밝혔다고 한다. 또 태국 현지의 순방 지원 인력도 대부분 남성들로 채웠다고 한다.
윤창중 사태 이후 ‘윤창중 트라우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와대와 공직 사회의 분위기는 전례 없이 경직돼 있다. 우선 청와대 인사들의 몸조심, 몸 사리기 분위기가 상상 이상이다. 윤창중 사태로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실을 중심으로 방미 수행단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까지 강도 높은 감찰 조사가 이뤄지고,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상당수의 청와대 인사들은 아예 숨어버렸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 정도다.
사진제공=청와대
정부 부처나 공기업 등의 분위기도 경직되긴 마찬가지다. 정부과천청사에는 골프 금지령에 이어 음주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예전에는 저녁 약속을 잡으면 식사 자리부터 술이 돌기 시작해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는데 윤창중 사태 이후에는 공직자들이 ‘밥은 먹어도 술은 못 먹는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식사 약속을 잡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아졌고, 골프 부킹을 부탁하는 사례도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윤창중 사태가 공직기강을 바로잡는 계기가 된다면 환영할 만한 일. 하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윤창중 사태가 워낙 엄청나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지만 최근 일련의 움직임들이 모두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윤창중 사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윤창중 트라우마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5월 15일 박 대통령이 언론사 정치부장단 초청 만찬간담회에서 쏟아낸 발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새로운 인물을 찾기 위해 절차를 밟았는데도 엉뚱한 결과가 나오고…. 이 말을 제가 또 언제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털어놨다.
트라우마는 똑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상처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왜곡된 판단과 행동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윤창중 사태로 인해 가뜩이나 사람을 잘 믿지 않고,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 온 박 대통령이 더 안으로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지난 2008년 5월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좌우를 넘나들었던 이전의 스탠스를 버리고 지나치게 보수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누리당의 한 고참 당직자는 “윤창중 사태 이후 인사 시스템을 강화해 이런 일이 재발되는 걸 막겠다는 대통령을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인사 시스템이 부실해서 이번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라 옆에서 ‘이 사람은 안 된다’고 그렇게 떠들어댈 때 대통령이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이 더 자기가 믿는 사람만 쓰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당직자의 지적처럼 윤창중 사태의 전개 과정, 특히 참모진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건을 보고하기까지 무려 26시간이나 지체됐다는 사실에서 박 대통령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평소 참모들이 대통령과 원활하게 소통하고, 필요할 때에는 직언을 무릅쓰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남기 전 홍보수석이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대통령께 보고를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면서 “대통령 스스로 참모들과의 소통 방식을 바꾸는 게 제2의 윤창중을 막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외상’을 의미한다. 특히 일반적으로는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이라는 뜻으로 쓰인다.